박지만 회장은 1997년 4월 《월간조선》과 인터뷰에서 육사 생도 생활을 회고했다.

인터뷰 내용 중 육사 생도 시절을 회고하는 부분만 발췌해 보면 아래와 같다.

-아버님에게 매를 직접 맞았나요.
"고교 시절에는 때리지 않으셨어요. 제가 육사 다닐 때 처음 맞았지요. 그 때 제 심경이 어땠는지 아세요? 피라미 육사생도가 국군 최고통수권자 앞에 서서 야단맞고 있다는 것을 상상해 봐요."

-육사에서 어떤 잘못을 했는데 그랬습니까.
"저는 사춘기가 참 길었어요. 자유스럽고 싶었죠. 내 맘대로 행동해 보고, 내 맘대로 친구들을 만나고 내 맘대로 어디든지 가고 싶었죠. 그런데 그게 해결이 안 됐어요. 항상 경호원들이 따라다니니까요. 그런데 어머님께서 돌아가시니까 경호가 더욱 엄해졌어요.
어머님이 살아 계실 때는 그런 불만을 얘기하면 친구들이랑 놀러가게 해 주셨는데, 어머님이 안 계시고 경호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높아져 더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됐죠. 그런 사춘기가 육사갈 때(1977년)까지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육사에 가자 고등학교 때 못하던 반항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요. 아버님이 그래서 많이 화가 나셨죠."

-육사에서는 매주 외출을 했습니까.
"그건 학년마다 달랐어요. 1학년은 한 달에 한 번 외박, 2학년 때는 두 번, 3학년 때는 세 번, 4학년 때는 매주 외박이 됐죠."

-어머님이 1974년에 돌아가시면서 그 후 아버님의 생활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제 기억에는 아버님의 패기 같은 것이 어머님 돌아가시고 많이 약해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남자가 훌륭하게 되려면 여자가 그렇게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어요."

◇아버지와 헤어지던 날

-1979년 10·26 사건이 나기 직전의 아버님은 어땠습니까.
"저는 그때 육사에 있었기 때문에 잘 몰라요. 그런데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게 있어요. 10·26 나기 바로 전 주말, 제가 외출외박을 했었어요. 청와대 2층에서 귀영하기 위해 생도 옷을 입고 내려가는데 그날 따라 아버님이 청와대 뒤편 주방 쪽까지 따라 나와 인사하는 저에게 '그래 잘 가, 잘 가' 그러시더라고요. 평상시엔 안 그러셨던 분이죠. '응, 그래 가서 고생해' 뭐 이 정도였죠. 그래서 제가 '아버님, 그만 들어가세요'라고 자꾸만 해도 '그래 가, 가'라며 계속 안 들어가셨어요. 저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계단을 내려왔는데 돌아보니 아버님이 계단 위에 서 계셨어요. 몇 번 '그럼 가겠습니다, 가겠습니다'고 인사를 하고 육사로 귀영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점차 낮아져 갔고 기자의 시선을 피해 사무실 창쪽으로 몇 번씩 고개를 돌렸다.

-10·26 사건 당일에는 어디 있었습니까.
"돌아가시던 날은 금요일 저녁 7시로 알고 있어요. 그 다음 날 제가 외출외박이 되는 날인데, 토요일 새벽에 갑자기 생도대장(장준익 장군)이 불러 '자네, 지금 집에 좀 가 봐라'고 하시데요. '내일이면 외출외박이 있는데요' 그러니까, '나도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빨리 들어가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생도복을 갈아입고 집으로 가는데, 시내 곳곳에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어요. 저는 처음엔 '아버님이 무슨 또 혼낼 일이 있으신가'라고 생각도 했어요.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은 청와대에 들어가 보니 많은 경호원들이 군복 대신 예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느꼈습니다. 아버님 시신은 신사복 차림이었는데, 그냥 편안하게 누워 계신 것 같았습니다. 내 방으로 올라가 음악을 틀어 놓고 울었습니다."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어떠셨나요.
"저 때문에도 많이 상심하셨을 겁니다."

-육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제가 육사를 간 이유가 있었습니다. 육사에 가면 이젠 경호를 안 받겠지. 육사 생도는 전쟁 나면 전쟁터에 나갈 텐데 거기서도 경호원이 따라다니겠느냐, 그런 희망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7개월 동안의 훈련이 끝나고 첫 외박을 나가는데, 경호원들이 대기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경호원 보고 '나는 육사생도인데 왜 따라다니느냐. 나는 이제 군인이다' 그랬죠. 그래서 다시 스트레스가 시작됐어요. 그때 만일 안 따라다녔으면 육사 잘 왔다는 생각도 많이 했을 텐데, 훈련을 마치니까 또 따라다니는 거예요. 그때 제가 경호실장에게 이런 말도 했어요. '이제 나는 군인인데, 전쟁 나면 전쟁터까지 따라붙을 거냐.
나도 이제 군인으로서 제대로 생활할 수 있게 해 줘야 하지 않느냐' 그랬더니 경호실장은 그냥 '허허' 하고 웃고 말아요. 그분들이야 자신들의 임무 때문에 그랬겠지만, 저는 이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려 한 게 아니라 어떡하든 빠져나가려고만 한 거죠. 거기서부터 행동이 삐뚤어지게 된 거죠."

◇생도대장 발언 듣고 군대에 환멸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20대 들어서면서 20대 특유의 패기 같은 것은 가져 보지 않았습니까.
"저는 아버님이 돌아가신 다음 해인 육사 4학년 때 그런 군대 생활이 아주 싫어졌어요. 아버님 돌아가시고 새로 생도대장으로 오신 분이 생도들을 교육시키는데, 참 낯 뜨거운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가 불과 얼마라고 아버님에 대해 저렇게 심한 말을 할 수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군대라는 데 대해 갑자기 환멸이 느껴지더라고요. 제대해야겠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막상 제대를 하고 나니까 아버님께서 벌어 놓은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막막했죠.

그렇다고 느닷없이 사업자본도 없이 사업을 할 수도 없고 했는데, 김우중·박태준 회장님 같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이만큼 온 거죠. 그러니까 20대의 패기라는 것보다는 저에겐 어떻게 의무복무 5년을 무사히 마치느냐 하는 생각이었죠.”

박 회장은 1981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방공포병 장교로 5년간 의무복무 기간을 마치고 1986년 3월 31일 예편했다. 그는 예편하기 1년 전인 1985년 3월 23일, 제3한강교 입구 강변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얼굴에 큰 상처를 입고 10여 개월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지금의 얼굴 상처가 그때 얻은 것입니다. 당시 제가 부대를 옮기게 되었는데, 부대 옮긴다고 선임하사와 인사과장 등과 회식을 했죠. 회식이라는 게 사실 술 먹는 거 아닙니까. 저녁 먹으면서부터 시작해 소주 양주 맥주… 하여튼 그날 무지하게 먹었어요. 음주운전이었죠. 그래서 사고가 났고, 굉장히 큰 사고였는데, 저는 운이 좋았어요. 혼자 벽을 받았고 생명도 무사했죠.”

-그 이후 상처를 치료했습니까.
"두번 성형수술을 했죠. 상처 없애는 성형수술이에요. 그런데 제가 거기서도 말을 잘 안들었어요. 이번엔 의사 선생님 말씀이죠. 햇볕 보지 말라, 딱정이 빨리 떼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 말을 하나도 듣지 않았죠. 지금은 이 정도 얼굴이지만 크게 다쳤었어요. 그래서 아직도 왼쪽 얼굴에는 사진발이 잘 안 받아요. 웃으면 얼굴 근육이 땅기기도 하고…." 그는 왼쪽 얼굴을 실룩실룩해 보였다.

[- 더 많은 기사는 월간조선 1997년 5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