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등에 20㎏짜리 책가방을 메고 있었다. 고3 아들이 내린 형벌이었다. 엄마는 가방을 메고 요리를 했고, 아빠는 거실에서 가방을 메고 아들 앞에서 벌을 섰다. 아들은 가방 멘 아빠 앞에서 대성통곡하면서 울었다. “엄마 아빠가 시키는 대로 다 했잖아요. 엄마 아빠만 믿고 따르면 된댔잖아요. 하지만 틀렸어요. 그건 엄마 아빠의 방식이지, 내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다고요. 엄마 아빠는 끊임없이 나를 잠수시키는 것 같았어요. 물속에 집어넣고 숨을 못 쉬게 하는 것 같았어요. 발버둥쳐 겨우 나오면 또 집어넣었어요. 속이 너무 답답했어요. 엄마 아빠는 늘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안다고 하셨죠? 한번 느껴보세요. 무거운 가방 메고 50분만 그렇게 벌서 보시라고요.” 아들은 토하면서 절규를 했고, 그런 아들을 보면서 부모도 주룩주룩 눈물을 흘렸다. 아들을 대치동의 공부기계로 만들려했던 부모의 참회의 눈물이었다.
경남 진주시에 있는 경상대학교의 부부교수인 김세범(경영학과)·이성원(영어교육과) 교수와 그의 아들 김후신군(서울대 경제학부 3년)의 2010년 8월 이야기다. 김세범 교수는 아들에게 대한민국 최고의 교육을 시켜 명문학교 출신으로 만드는 것을 아버지로서의 지상과제라고 여겼다.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김용성씨(2011년 작고) 밑에서 자란 그는 가풍을 중시했고, 딸 둘에 이어 느지막이 난 막내이자 외아들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다. “내 아들은 꼭 서울대에 보내겠다”며 엘리트 코스를 밟게 했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부모의 마스코트처럼 커갔다.
아들은 순종적이었다. 부모의 지시를 마다않고 엘리트 교육을 위해 경남 진주에서 조부모가 계시는 경기도 과천으로 유학왔다. 과천중학교를 다니면서 대치동 특목고 입시용 유명학원을 1년 넘게 다녔다. 10㎏ 넘는 책가방을 메고 50분이 넘는 거리를 다녔다. 왕복 두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는 아들의 학교 성적과 학원 성적을 그래프로 그려가며 분석했다. 공부기계가 돼 가던 아들은 부모의 교육방식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여러 차례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급기야 아들은 극도의 스트레스로 혼절했다. 고3 때까지 무려 스무 번 정도 쓰러졌다. 그제서야 부모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아들 대하는 방식을 급선회했다. 아빠는 안식년을 얻고, 엄마는 휴직한 후 아들에게 전념했다. 아들 곁에서 아들이 원하는 방식의 사랑을 듬뿍 쏟았다. 위에 언급한 ‘가방 형벌’은 ‘내 마음을 알아주세요’라며 아들이 내린 극단적 방책이었다. 부모를 향해 쌓인 분노를 터뜨린 아들은 서서히 안정감을 되찾았다. 결국 서울대 경제학부에 입학해 성적우수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있다.
이들 가족을 만나기까지 오래 기다렸다. 김세범 교수는 한 교회에서 본인의 잘못된 교육방식에 대한 참회록을 읊었고, 이를 본 교인들은 울고 웃었다. 그 아픔이 대한민국 입시생 부모의 공통 아픔으로 느껴져 울었고, 책가방 메고 벌서는 교수 부부의 모습을 상상하며 웃었다. 김세범 교수에게 ‘新인재시교’ 인터뷰 요청을 하자, “아들한테 벌 받은 게 무슨 자랑이라고 언론 인터뷰에 응하겠습니까”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여러 번 설득 끝에 “잘못된 교육방식으로 아이들을 멍들게 하는 대한민국의 부모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며 응했다. 하지만 김후신군의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김군은 여전히 마음의 상처가 남은 상태였다. 세 달 넘게 기다린 끝에 김세범 교수로부터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인터뷰가 아직 유효한가요? 아들 마음이 열렸습니다.”
지난 11월 4일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는 김세범 교수의 집에서 김 교수 부부와 후신군을 만났다. 김 교수 부부는 진주와 서울 집을 오가며 살고 있다. 큰딸은 미국 인디애나주립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고, 둘째 딸은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후 임용고시 준비 중이다. 김후신군의 눈망울은 유난히 맑았다. 동행한 사진기자는 “너무 맑고 투명해 사슴 같다. 저런 눈망울을 가진 아이라 더 쉽게 상처받았을 것 같다”는 말을 기자에게 했다. 김세범·이성원 교수 부부는 온화한 표정과 말투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김군에게 인터뷰에 응한 이유를 먼저 묻자 이런 답을 했다. “일단 부모님이 원하시는 것 같고, 정신건강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학교 선생님 중에는 학생의 가치를 성적순으로 매기는 분들이 대부분이에요. 자신의 가치가 수치화되는 건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죠. 그 안에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잃지 않고 지켜나가는 게 중요해요.” 그는 자신에게 맞지 않는 교육방식으로 인한 극도의 스트레스를 겪어내면서 ‘참된 자녀교육은 과연 뭘까?’에 대한 고민도 깊었다. 스물두 살의 그는 이에 대한 자신만의 정답지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제가 부모가 된다면 아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줄 거예요. 저는 겁이 많아서 어른들이 나에게 부여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데에만 특화돼 있었어요. 내 스스로 인생을 진취적으로 개척해나가는 적극성이 부족하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잘하고, 내가 가려 하는 길에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를 생각할 수 있는 힘이 부족했어요. 한때 저는 전형적인 모범생이었어요. 모범생이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부모가 되면 사회적 맥락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잘 반항하는 법을 알려줄 거예요.”
이 말을 듣고 있던 부부는 말이 없었다. “만약 후신이의 중학교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하겠냐?”는 우문에 부부는 “서울로 보내지 않고 옆에 끼고 있을 거다”라는 공통의 답을 한 후 각자의 대답을 했다.
“편하게 해줄 것 같다.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맘껏. 돌이켜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김세범)
“부모의 욕심 때문에 후신이가 힘든 시간을 보냈다. 진주에서 후신이는 민사고가 뭔지, 외고가 뭔지 잘 몰랐다. 우리의 꿈을 아이한테 심은 거다. 과천으로 전학시키면서 ‘전학가면 친구 없는데 괜찮아?’ 물었더니 ‘괜찮다’고 답했다. 아이가 전학 이후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얼마나 알겠나. 부모가 원하는 답을 했던 거다. 힘든 과정을 함께 헤쳐나가면서 후신이한테 참 미안했다.”(이성원)
부모에 대한 아들의 앙금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다. 김군은 “지금도 아버지 어머니와 사이가 아주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 답했다. 김군의 취미는 맛집 탐방. 그는 가끔 부모를 모시고 자신이 받은 장학금으로 한턱 거하게 쏘기도 한다. 그의 2학년까지의 성적은 평점 4.2가 넘는다.(4.3 만점)
김후신군은 순종적인 아이였다. 부모를 과도하게 믿었고, 부모가 시키는 대로 다 하는 모범생이었다. 특목고를 보내려고 부모와 떨어져 지내자고 했을 때에도 부모님의 지시대로 따랐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1년간 대치동 유명학원을 다니면 특목고(용인외고)에 덜컥 합격할 줄 알았다. 그는 성실했다. 학원에서도, 학교에서도 최상위권을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낙방.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변해갔다. 부모에 대한 신뢰가 깨지면서 세상과 어른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 성격도 변했다. 순종적이던 그는 반항적이 돼 갔다. 때때로 난폭한 모습도 띠었다. 수업을 거부하고 뛰쳐나가기도 했고, 선생님한테 물건을 집어던지면서 욕설도 했다. 갑자기 변한 아이의 모습에 충격받은 교사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고, 아버지는 전화기 너머 아들의 괴성을 들었다. 아버지 김 교수는 “너무 놀라서 화장실 한 번 안 가고 4시간을 자동차로 달려 과천에 갔다. 후신이가 정신이 나간 줄 알았다. 가서 보니 눈동자가 정상이라는 걸 알고 안도했다”고 말했다.
그의 낙방 요인은 뭘까. 그 스스로는 “어려풋이 낙방을 예감했다”고 말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한 학원을 오래 다니다 보니 그 학원의 패턴에 익숙해지더라. 실력을 쌓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듣고 있던 어머니 이 교수는 “우리도 몰랐다. 그렇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남들 말대로 대치동 최고의 학원을 보내는 게 이 아이를 위한 최선의 길인 줄 알았다”며 거듭 미안해했다. 역설적이게도 이 일을 계기로 김군은 자신만의 공부법을 터득했다. 김군은 “부모에 대한 불신이 생기면서 내 길은 내가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스스로 공부법을 찾아나갔다. 깊이 독서하고 의미를 곱씹는 공부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대에서 평점 4.2가 넘는 괴물 학점을 받게 된 건 이런 과정의 결과다.
김군을 힘들게 한 요인이 하나 더 있다. 잦은 전학이다. 초등학교 때에는 안식년을 받은 부모를 따라 미국에서 지내다 2학년 때 한국으로 왔고, 중학교는 진주에서 다니다 외고 진학을 위해 과천중학교로 전학왔다. 고등학교 또한 인천외고에서 한 학기 다니다 과천외고로 전학갔다. 초·중·고등학교를 각각 두 개씩 다녀 총 여섯 개의 학교를 거쳤다. 아버지 김 교수는 “전학 다니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랐다. 정상적으로 친구를 사귈 시간이 없었다. 한 친구를 사귈 만하면 전학갔으니까 말이다. 공부 잘하니까 잘 버틸 줄 알았다.”
결정적인 문제는 교우 관계에서 터졌다. 잦은 전학으로 속 깊은 친구가 없던 그에게 고등학교 때 마음 알아주는 친구가 생기자 무섭게 집착했다. 처음으로 생긴 절친은 그에게 단순한 친구 이상의 존재였다. 믿고 의지할 만한 하나의 소우주였다. 부모에게도, 선생님에게도 보이지 못한 속마음을 열어 보였다. 하지만 친구는 그의 집착을 부담스러워했고, 급기야 연락하지 말라는 선고를 했다. 이 일을 계기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김군은 “속이 메슥거리면서 토할 것 같았는데 더 이상은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응급실에 실려가 온갖 검사를 다했지만 아무 이상 없었다. 의사는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 몸은 스스로 퓨즈를 끈다. 자기 보호 장치를 가동하는 거다”라고 말했다.
이후로 그는 자주 퓨즈를 껐다. 공부 때문에, 부모 때문에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자주 병원에 실려갔고, 정기적으로 소아청소년과 상담을 받았다. 그제서야 부모는 ‘이건 아니다’라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 이 교수는 “정신적으로 피폐해가는 아들을 보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깨달았을 땐 늦었다. 부모 중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부부가 함께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땐 후신이의 대학 진학은 엄두도 못 냈다. 고등학교만 정상적으로 졸업하기를 바랐다.”
아들이 고2가 되면서 부부는 안식년과 휴직을 사용해 아들 곁으로 함께 왔다. 어머니는 2년간, 아버지는 1년간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았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아들을 위해 반경 20분 거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수병 역할을 자처했다. “내가 해군 출신인데, 해군의 졸병을 수병이라고 한다. 아들에게 ‘내가 너의 수병이 되겠다. 24시간 대기하면서 시키는대로 다 하겠다’라고 했다. 아들이 밤 11시에 펜을 사오라고 하면 달려나가 사다줬다. 내 눈에는 아들의 머리가 벌겋게 보였다. 늘 폭발 직전이라 초긴장 상태로 살았다.” 어머니는 “변한 아들이 너무 무서웠다.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아들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더라”라고 말했다.
그간 못 받은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은 아들. 하지만 단번에 변하진 않았다. 격랑과도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운전하는 엄마에게 뒷좌석에서 물을 붓기도 하고, 부모를 향해 욕설을 하기도 했다. 부모의 속도 썩어 들어갔다. 어머니 이 교수는 “마음은 견뎌냈는데 몸이 울더라. 면역체계가 깨져서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다”라고 했다. 전문가에게 신세 한탄을 하면 “아이 옷을 다 더럽혀 놓고 세탁기 한 번 돌리면 끝나는 줄 아냐?”며 포기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가방 형벌’을 내렸다. 아버지 김 교수의 말이다. “집에 왔더니 집사람이 가방을 메고 음식을 하고 있더라. ‘터졌구나, 당했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도망가려 했으나 때를 놓쳐 안방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잠시 후 아들이 ‘아빠, 좀 나오셔야겠어요’ 하더라. 눈동자를 보니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아이를 꺾으면 부러져버린다는 걸 알았다. 내가 꺾여야 저 애가 산다는 걸 알았다.”
아들은 큰 가방을 가져와 교재를 잔뜩 넣었다. 20㎏짜리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50분간 메고 벌을 서게 했다. 어머니는 “아빠는 체면이 있으니 10분만 서면 안 되겠냐”고 애원했지만 아들은 단호했다. 자신이 대치동 학원에 다니면서 하던 여정대로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아들은 울며불며 통곡했다. 토하면서 분노를 터뜨렸다.
김후신군도 울고, 엄마도 울고 아빠도 울었다. 아빠의 감정은 복합적이었다. 미안함도 있었지만 아버지로서의 서글픔도 컸다. 뜬눈으로 밤을 지샌 후 다음 날 아침, 작은 사고가 터졌다. 아들을 위해 찬물을 대령하려던 아버지가 냉장고에 부딪혀 이마가 찢어지는 바람에 열 바늘이나 꿰맨 것. “피가 철철 흘러 병원에서 꿰매면서 많이 울었다. 서러웠다. 아들 낳은 순간이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였는데, 그 아들 학교 보내는 게 이렇게 힘드는구나 싶어서 한참 울었다.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그 말을 듣고 있던 어머니 이 교수의 뺨에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김후신군은 ‘가방 형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처음이자 마지막 시도였다. 다행히도 엄마 아빠가 벌을 서 주셔서 속이 시원했다. 묵은 체증이 가시는 느낌이었다. 부모를 대하는 것도 편해졌다.” 김군에게 “만약 부모가 가방 형벌을 받지 않고 더 강하게 나왔으면 어떻게 됐을 것 같은가?” 묻자 그는 “마음의 문을 영영 닫았을 것”이라고 준비한 듯 말했다.
김군에게 내내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 극도의 스트레스를 겪으면서 어떻게 최고의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는 “성적은 나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그것마저 무너져 내리면 내 존재감이 없어져버릴 것 같았다. 말하자면 최후의 보루였다”라면서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공부가 재미있다. 성적은 나에게 더 이상 최후의 보루가 아니다. 미래를 위한 수단이다”라고 말했다.
미래의 꿈을 묻는 질문에 김군은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법조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경쟁법에 관심이 많다. 대학 와서 경제학을 처음 공부했는데 너무 재밌더라. 그런데 학풍 자체가 이론에 치중하는 감이 있어서 아쉬웠다. 그러다 눈을 돌린 게 법학이다. 경쟁법은 경제학을 제도적인 툴로 이용한다는 자체가 매력적이다.”
이런 답을 하는 김군을 바라보는 부부의 눈빛은 복합적이었다. 대견함과 미안함이 얽혀 있었다. 부부는 격랑의 시간을 겪으면서 자녀교육관이 바뀌었다. 어머니 이 교수는 교육자로서 태도가 바뀌었다. 학생의 편에서 이해하는 법을 알게 됐다. 아버지 김 교수는 권위를 내려놓았다. “아들의 가방 형벌 이야기를 하면 지인들이 ‘그런 나쁜 아들이 다 있냐?’며 흥분한다. 하지만 상처 난 가지를 꺾어내지 않으면 나무 전체가 죽어버린다. 회복할 수 없고 영영 관계가 단절돼 버리는 거다. 아버지의 권위는 꼿꼿함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김후신군은 인터뷰 말미에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성적으로 줄을 세우는 사회, 경쟁을 권하는 사회 때문에 상처받는 학생들이 많다. 구조적 모순을 쓸어버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나. 그걸 보완해줄 수 있는 주체는 가정밖에 없다.”
김세범·이성원 교수의 TIP
아이와 화해하고 싶다면 권위를 내려놓아라
❶ 부모의 욕심을 아이에게 투영하지 마세요
부모가 생각하는 최고의 가치와 아이가 생각하는 최고의 가치는 다르다. 또한 최고의 가치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부모 세대의 최고의 가치로 인정됐던 것들이 아이가 주인공이 된 20~30년 후에는 평가절하될 수 있다. 부모의 방식대로 하는 사랑이 아이를 숨막히게 한다. 진정한 사랑은 부모의 방식대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원하는 방식의 사랑을 베풀어주는 것이다.
❷ 아이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세요
부모가 조정하는 대로 움직이는 모범생은 위험할 수 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를 생각할 겨를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뒤늦게 슬럼프를 맞게 될 확률이 크다. 서투르고 늦더라도, 좌충우돌 실수를 하더라도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줘라. 아이는 부모의 분신이 아니다.
❸ 아이의 마음이 곪아 있다면 터뜨리게 해주세요
아이는 부모의 감정상태를 직관적으로 알아차린다. 받아줄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부모에게는 분노를 터뜨리지 않는다. 부모로 인해 쌓인 분노가 있는데 부모는 계속 꼿꼿하고 강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꺾이지 않는다면 화해의 기회가 없다. 영영 단절되고 만다. 아이와 관계회복을 하고 싶다면 곪아 있는 상처를 터뜨릴 수 있는 여지를 줘라.
❹ 부모의 권위는 꼿꼿한 태도에서 나오지 않아요
상처 입은 아이와 화해하기 위해서는 부모로서의 권위를 내려놓아야 한다. '내가 아버지인데, 아버지로서 권위가 있지,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감히…' 이런 식의 태도는 영원한 단절을 초래한다. 부모의 권위는 꼿꼿한 태도에서 나오지 않는다. 진정한 권위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에서 우러난다. 아이는 부모의 진심을 다 안다. 체면과 위신을 내려놓는다고 부모로서 권위가 꺾이는 것이 아니다.
❺ 가정은 최후의 안식처예요. 품어주세요
입시제도에 찌든 아이들이 쉴 곳은 가정밖에 없다. 부모마저 아이를 성적으로 달달 볶으면 아이의 마음은 갈 곳이 없다. 부모가 완충역할을 해 줘야 정서적으로 안정감 있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은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과 긍정의 힘에서 우러나온다. 따뜻하게 감싸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