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그림 법(法) 앞에선 김호석 화백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얼굴이 왜 사라졌을까?

중견 수묵화가가 김호석 화백이 최근 전시회에 내놓은 노무현 전 대통령 그림에는 얼굴이 없다. 그림 제목은 '법(法)'.
김 화백은 원래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인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가 아니다. 오히려 노 대통령 재임시 청와대에 불려가 초상화를 그린 역량있는 중견작가. 그가 법이라는 화제로 얼굴없는 노 전 대통령을 그린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선 노무현에 대한 추억담을 들어볼 필요가 있겠다.

그는 노 대통령 퇴임 1년 전 청와대로부터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사저에서 처음 만났다. 김 화백은 첫 대면에서 노 대통령이 갖고 있는 생각이 예술적으로 상당한 수준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 김 화백이 기억하는 대통령의 미학적인 식견을 드러내는 발언 한 대목.

"조선의 소나무는 외국의 소나무와 다릅니다. 이파리, 줄기, 탈을 만들 때 쓰이는 껍질, 서리가 내렸을 때 줄기의 고동색과 황토빛 등이 외국 소나무와는 다릅니다. 그리고 추위에 떨고 있는 초록색이 바로 조선의 색깔입니다. 이 색깔이 가슴을 저리게 만듭니다. 소나무를 포치(布置)하는 법은...“

김 화백은 노 대통령의 입에서 포치라는 말이 나오는 데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포치라는 말은 화가들이나 쓰는 전문용어이기 때문. 해서 김 화백은 대통령에게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 화백 “그 정도로 미학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보니 독서가 많으신 것 같습니다.”

노 대통령 “예술은 느낌입니다.”

노 대통령은 김 화백과 예술과 미학에 대한 담론을 주고 받으며 김 화백의 의견에는 “맞습니다”하고 흔쾌히 동의를 해주기도 했다.

점심은 함께 설렁탕을 먹었다. 반찬으로는 깎두기, 풋고추, 시래기 참기름무침. 식사와 함께 우유가 나온 게 특이했다. 김 화백은 너무나도 수수한 상차림을 보고 대통령이 검소한 것을 과시하려는 것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도 그 정도의 상차림이 계속 이어졌다. 김 화백은 특히 대통령이 식사 중간중간에 우유를 마시는 것을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김 화백 “대통령께서는 극빈(極貧)을 경험하셨군요”

노 대통령 “어떻게 아셨나요?”

김 화백 “밥 먹는 도중에 우유를 마시는 것은 고소한 맛을 느끼려는 것입니다. 이는 극빈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모르는 것입니다.”

김 화백은 이처럼 대통령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그가 매우 서민적이라는 사실을 체감하게 되었다. 그는 초상화를 그릴 때에도 양복 대신에 한복을 입으라고 요청했다. 수묵화가인 김 화백이 양복 입은 대통령 초상을 그리는 것도 어색한 일.

김 화백 “우리의 그림을 그리는 데 양복을 입을 수는 없습니다.”

노 대통령 “조선옷을 입으란 말입니까?”

김 화백 “예, 조선옷입니다.” 하고는 두 사람을 함께 웃음을 지었다.

노 대통령은 김 화백의 권유로 쪽빛 두루마기를 입고 의자에 앉았다. 김 화백은 이틀 동안 노 대통령의 모습을 화선지에 담았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의 지위에 앉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가를 편안하게 해주는 모델이었다. 김 화백의 회고.

“대통령이 졸고 계셔서 내가 ‘눈을 똑바로 드세요’ 하면 바로 ‘네’하시고 바로 뜨시는 거에요. 다리의 자세가 어색해서 ‘다시요’ 하면 자세를 다시 잡으십니다. 심지어 두루마기선을 다시 그려야 한다고 하면 일어나서 툭툭 털고 다시 앉으셨습니다. 화가를 위해 노력해주시는 데 고마울 정도였습니다. 조선시대 임금님을 그리는 화가가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예술에 대한 식견이 없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대접이었습니다.”

그림도 두달 사이에 단 이틀 동안 그렸지만 가장 청명한 날을 택했다. 김 화백의 그림에 노 대통령은 대단히 만족했다고 한다. 특히 김 화백의 섬세하고 정확한 묘사에 감탄했다는 것. 김 화백이 그린 초상화를 보고 좋아하는 노 대통령의 반응.

“아내와 연애할 때 논두렁에서 넘어져서 왼쪽 눈가에 상처가 있는데, 이것은 나와 아내만이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까지도 그리셨네요. 이제 그 상처를 아는 사람은 이제 우리 부부와 김 화백 모두 세 사람이 되었네요”

김 화백이 볼 때 노 전 대통령은 친근하게 다가오는 서민의 대통령 그 자체이다. 그런데 그는 왜 노무현의 얼굴을 지웠을까?

그는 노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원칙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원칙을 세우고자 합니다. 축구선수가 축구할 때 원칙이 없으면 개판이 됩니다. 다들 나를 대통령직에서 몰아냈습니다. 그래도 나는 원칙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김 화백이 ‘법’ 이라는 제목으로 그린 작품에서 얼굴없는 노 전 대통령을 표현 한 것은 바로 노 전 대통령이 원칙을 세우려 한 노력이 지워지는 데 대한 아쉬움에서이다.

“대통령이 세우려 한 원칙이 요즘에는 법이라는 이름으로 지워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누가 앞으로 대통령을 하려 할까요? 미래는 암울해 지는 것 아닙니까? 나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가 공통으로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외교문서나 NLL 등을 놓고 이전 대통령을 지워나가는 데 대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김 화백이 노무현에 대한 추억만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면..., 노무현에 대한 아쉬움만을 표현했다면, 어찌 감히 얼굴없는 대통령을 그릴 수 있겠는가? 오히려 노 전 대통령의 얼굴에 진지해 하거나, 아쉬워 하거나, 또는 화난 표정을 그려 넣을 수도 있겠다.

세밀화에 관한 한 국내 최고 수준에 오른 김 화백이 얼핏 추상화 같기도 한 얼굴없는 노 전 대통령을 그린 것도 매우 이색적인 일일수 있겠다. 하지만 바로 이 대목에서 단순한 정치선동과 예술의 차이가 발생하는 듯 하다.

김호석 작 '법(法)'

김 화백의 설명.

“미술은 주관적입니다. 그리고 상반된 것들을 조화시키는 게 예술입니다. 부드러운 것과 사나운 것을 조화시키는 것이 예술입니다. 이 그림에도 얼굴을 없지만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은 담았어요. 홍운탁월법(烘雲托月法)1)으로 그렸다고나 할까요.”

도대체 무엇을 그렸을까?

“이것은 단순히 노 전 대통령 그림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고 우리 사회의 일상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잊혀져서는 안될 것들이 법이라는 이름 하에 극단적으로 배척당하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했습니다. 그러한 세태나 일상에 대하여 예술로서 답하고 싶은 마음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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