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 15일자 주간조선 커버스토리를 장식한 김영옥. 김영옥이 세상을 뜨기 약 4개월 전 작성된 이 기사는 김영옥의 일대기와 무공을 본격적으로 알린 최초의 기사였다.

지난 4월 LA에 살고 있는 재미언론인 한우성(57)씨는 한국으로부터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의정부 효촌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이 보낸 5분짜리 동영상이었다. 동영상에서 아이들은 초등학교 5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전쟁영웅 김영옥’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메일 말미에 한씨에게 합창하듯이 외쳤다. “한우성 기자님, 우리 학교로 와주세요.”

한씨는 한 달 후 효촌초를 방문해 4~6학년 아이들 50명 앞에서 김영옥에 대한 강의를 했다. 상당수 아이들은 김영옥이 왜 위대한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한씨는 “김영옥의 리더십과 희생정신, 2차 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불세출의 전쟁영웅이 된 군인으로서의 능력, 그의 퇴역 후 봉사활동에 대해 아이들에게 얘기해줬다”며 “김영옥의 86년간의 삶에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부분이 각기 따로 있었다”고 했다.

한씨는 “당시 아이 어머니 한 분이 아이를 통해 편지를 보내왔는데 ‘아이들이 지금 나이에 배우는 것이 앞으로 아이들의 인생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린다’며 김영옥의 삶을 아이들이 알게 해준 데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말했다.

지난 9월 말 한국을 방문해 10차례 가까운 김영옥 강연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한씨는 최근 강의에서도 ‘감사의 인사’를 받았다. 지난 10월 10일 경기도 파주에서 김문수 지사를 비롯한 경기도 공무원과 도 의원들, 몇몇 시장들과 지역 경제인 300명 앞에서 한 강의에서였다. “강의가 끝난 후 한 분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자신은 경기도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전쟁세대’라고 소개하면서 강연 내내 눈물을 흘렸다고 하더군요. 김영옥 같은 분이 있어 가슴이 저린다, 그런 분 때문에 우리 사회가 발전했다며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한씨는 “김문수 지사가 강연 후 미팅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각각 인천과 수원 출신인 ‘경기도인 김영옥’을 기리는 동상을 경기도에 세우라고 부지사를 포함한 도청 공무원들에게 지시했다”고 전했다. 이 자리에 배석했던 공무원들은 동상과 함께 작은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도 좋겠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2005년 12월 김영옥 일대기를 담은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북스토리)을 펴낸 한씨는 말 그대로 ‘김영옥 전도사’이다. 미주 한국일보 기자로 있던 1997년 LA 인근 토렌스의 김영옥 사무실로 무작정 찾아가 그의 일대기를 집필하기로 어렵게 응낙을 받은 후 8년에 걸쳐 김영옥의 인생을 살려냈다. 그가 왜 김영옥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남기기로 결정했는지는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한씨는 1992년 LA 흑인폭동을 계기로 ‘오렌지 주스 한 병을 훔친 흑인 소녀를 총으로 쏴 죽인 무자비한 사람들’로 오해받고 있던 재미동포들의 참모습을 보여줄 모범적인 재미동포를 찾고 있었다.

그가 찾던 인물은 네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해야 했다. 한국에 뚜렷이 공헌했을 것, 미국에 뚜렷이 공헌했을 것, 그럼으로써 한·미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것, 나아가 한·일 관계 개선에도 도움이 될 것. 이 기준을 만족시키는 사람을 찾아 나서다 결국 찾아낸 인물이 김영옥이었다.

한씨와의 첫 만남에서 김영옥은 자신에 대한 취재를 거부했다고 한다. 자기가 책으로 써질 만한 인생을 살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취재를 포기하려다 던진 말 한마디가 김영옥을 움직였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특히 한국인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는데,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들을 위해 큰일을 해주십시오.” 한씨의 이 말에 나이 78세의 노병은 ‘큰일’이 뭔지를 물었고, 한씨는 “지금까지 살아오신 이야기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결국 김영옥을 설득해냈다.

8년간 김영옥을 취재하면서 그가 무엇보다 놀란 것은 김영옥이라는 사람의 겸손함이었다. 남들이 몇 번의 인생을 살 만큼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그였지만 그는 결코 자신의 성취와 업적을 드러내지 않았다. 2차대전 당시 UPI통신과 LA타임스를 장식했던 이 전쟁영웅의 삶은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가 받은 수십 개의 무공훈장은 그의 라스베이거스 자택 차고의 한구석 먼지 덮인 상자 속에 처박혀 있었다. 한씨는 이 전쟁영웅의 삶을 수많은 참전용사 인터뷰, 수만 장의 미군 작전문서 분석, 유럽과 한국의 전장 현지 취재를 통해 되살려냈고, 김영옥과 부자지간 같은 관계가 돼 임종까지 지켰다.

◇ 프랑스 정부가 김영옥에게 종전 60년이 다 된 시점에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 레지옹 도뇌르를 줬다는 단신 외신

한씨는 2005년 김영옥이 세상을 뜬 후에도 그의 인생과 업적을 알리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그는 한국에서 김영옥 강연을 매년 수차례 빠짐없이 이어왔다. 이 강연이 올해로 100회를 돌파한다. 그의 강연은 우리 사회에 ‘김영옥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진원지다. 강연 대상과 장소도 다양하다.

그가 이번 방한에서 강연했거나 예정돼 있는 곳만도 경기도청, 수원시청, 은평구청, 우송대, 부경대, 서울서부교육지원청, 해군작전사령부, 해양경찰대 등 가지각색이다. 한씨는 “초등학생부터 60~70대 퇴직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김영옥에 대해 듣고 싶어하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며 “강연을 들은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또 다른 강연 요청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미 우리 사회 수만 명에게 김영옥 바이러스를 퍼뜨려온 한씨를 기자는 2005년 그가 김영옥 일대기 원고를 마무리할 즈음 만났다. 프랑스 정부가 ‘2차대전 때 프랑스를 구해준 영웅 김영옥’에게 종전 60년이 다 된 시점에서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주었다는 단신 외신이 계기였다. ‘한국인임이 분명한 김영옥이라는 사람이 2차대전 영웅이었다?’ 기자는 김영옥을 인터뷰하러 LA행을 준비하다 이 노병이 사경을 헤매며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전쟁에서의 부상으로 온몸에 11군데의 신경이 절단됐고 큰 수술만 약 40차례나 받아야 했던 그가 고단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내려놓고 있다며 인터뷰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접했다. 대신 기자는 8년에 걸쳐 그의 인생을 추적해온 한우성이라는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서울에서 만난 한씨는 기자에게 선뜻 자신이 8년간 작업해온 미완성의 원고를 내밀었다. 한시바삐 김영옥이라는 인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싶다는 이유였다.

한씨와의 인연을 계기로 김영옥은 주간조선 2005년 8월 15일자에 ‘노병은 죽지 않는다!’는 제목의 커버스토리로 실렸다. 국내 언론에 그의 일대기와 전설적 무공이 처음 본격적으로 소개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기사 도입부에서 기자는 이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왜 이 인물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썼다. “김영옥이 누구인가. 신문을 꼼꼼히 읽는 사람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에 그의 이름 석 자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이력을 잠깐만 더듬어봐도 그의 범상치 않은 삶을 엿볼 수 있다.

‘미 육군 예비역 대령, 미 역사상 실제 전장에서 대대를 지휘한 첫 소수인종 장교,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의 로마 해방을 앞당긴 주역, 미 대통령 부대표창을 두 차례 받은 전설적 일본계 부대(100대대·442연대)를 이끈 장교, 한국전쟁에서 무패의 신화를 남긴 미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장, 미국·프랑스·이탈리아 정부로부터 20여개의 무공훈장 수여….’ ‘커널(colonel·대령) 김’은 미국인들에게 ‘미국의 전사(戰史)를 새로 쓰게 한 위대한 군인’으로 각인돼 있다.

프랑스 동북부 브뤼에르 지방 등 그가 2차대전 당시 독일군으로부터 해방시킨 지역에서는 ‘카피텐 김(김 대위)’이라는 동양인 장교의 이름이 아직도 전설처럼 떠돌고 있다. 또 한국전쟁 당시의 ‘김영옥 소령’은 그가 거두고 보살핀 수백 명 전쟁고아들로부터 평생의 은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2차대전과 한국전쟁이라는 20세기의 가장 처참한 전쟁을 온몸으로 뚫고 온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데 삶을 던졌다. 한번은 파시스트 독재로부터, 또 한 번은 공산주의 독재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느라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다.”

이 주간조선 기사가 나간 지 8년. 김영옥은 한우성씨의 표현대로 ‘우리 사회의 또 하나의 신드롬’이 돼 버렸다. 한국인들에게 낯설었던 이 노병은 한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이 롤모델로 삼는 우리 시대의 영웅이 됐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김영옥을 얘기하고 있고, 이념·성별·연령·출신지를 떠나 김영옥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김영옥 신드롬은 김영옥 사후의 성취가 밑바탕이 됐다. 생전에 “나는 100% 한국인이자 100% 미국인”이라고 말해왔던 이 전쟁영웅에게 한국 정부는 2006년 종전 53년 만에 뒤늦게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한국전쟁과 관련해서는 무공이 새롭게 밝혀지더라도 훈장을 새로 발급하지 않는다는 반세기 넘는 원칙을 깨고 한국 정부가 예외적으로 훈장을 추서한 것이다. 2차대전 당시의 무용담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던 한국전쟁에서의 활약상을 재평가한 것이다. AP, UPI 등의 언론사들이 타전할 만큼 뛰어난 활약상을 보인 이 2차대전 영웅은 종전 후 전역해 LA에서 빨래방을 창안하면서 백만장자의 길로 들어섰다가 아버지의 나라가 포화에 잠겼다는 얘기를 접하자마자 다시 총을 들고 한국으로 날아왔다.

◇ 미군 대대장으로 ‘소양강 전투’ 등을 이끌어..중부전선 60km 북상 가능했던 것도 그 덕분

그는 대대장으로 미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를 지휘하며 ‘소양강 전투’ 등을 이끌며 2차대전 때의 불패신화를 재현했고 특히 1951년 5~6월 그의 승전에 힘입어 38선 이남에 형성돼 있던 중부전선이 60㎞나 북상할 수 있었다. 이 전선은 오늘날 휴전선의 모습으로 굳어졌다.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된 지 5년 후인 2011년 초등학교 5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에 그의 이야기가 게재됐다. 모두 4쪽에 걸쳐 소개된 그의 업적과 생애는 현 중학교 1학년 아이들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한우성씨는 “지금 초등학교 5~6년과 중학생 1학년 아이들에게 김영옥은 이순신 제독만큼이나 친숙한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2011년 김영옥은 한국 육군리더십센터 교육과정 소재로도 채택됐다.

이곳에서 매년 수천 명씩 배출되는 육군 소위 소대장 요원들은 ‘초군반’ 수업 시 김영옥의 무공과 전략, 리더십을 1시간씩 배우고 있다. 전병규 육군 공보과장은 주간조선과의 전화통화에서 “김영옥 일대기는 국방일보에도 연재됐고 수방사 등 몇몇 부대에서는 김영옥 일대기 독후감 대회까지 열다”며 “김영옥은 이제 한국군의 롤모델이 됐다”고 말했다. 미군 역시 그의 로마해방전 활약상을 케이스 스터디 대상으로 연구하고 있다.

김영옥 사후 그에 대한 재평가는 미국에서도 일어났고 이 소식은 다시 한국으로 전해지며 김영옥 신드롬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2009년 LA 코리아타운에는 ‘김영옥 중학교’가 탄생했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한인 이름을 딴 이 학교는 코리아타운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학생 1600명(6~9학년, 한 학년당 400명) 중 10%만이 한국계다. 나머지 90%의 다양한 인종의 학생들이 교육과정에 포함된 김영옥 일대기를 배운 후 미국 사회로 진출한다.

2010년에는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주립대학에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가 설립됐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한인의 이름을 딴 대학기구이며, 한국으로서는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국제무대에 세운 최초의 해외동포연구소이기도 하다. 이 연구소 설립에는 캘리포니아주립대뿐 아니라 한국 정부와 재미 한인사회도 기금을 냈다. 2011년 미국의 포털사이트인 ‘msn.com’은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 16명을 선정하며 유색인으로는 김영옥 한 사람만을 포함시켜 화제가 됐다. 당시 나머지 15명의 전쟁영웅들은 워싱턴, 그란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등 모두가 백인들이었다.

한우성씨가 김영옥 강연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뛰어난 군인이자 전쟁영웅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통합자이자 인도주의자로서의 면모도 크다. 오히려 현재 우리 사회에 필요한 그의 리더십은 이러한 측면에서 더 배울 게 있다는 것이 한씨의 설명이기도 하다. 실제 김영옥이 죽었을 때 LA타임스는 ‘통합자(Uniter)의 서거’라며 그를 기렸다. 한우성씨가 김영옥 일대기를 쓰기로 결정한 기준과 딱 부합하게 김영옥은 전역 후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까지를 아우르는 위대한 통합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한국전쟁에서의 중상 탓으로 장군 진급을 못하고 1972년 대령으로 예편 후 재미동포 사회에 대한 봉사로 한국과 미국의 거멀못 역할을 했다. 현재 재미동포를 위한 주요 복지·보건기관 중 그가 산파 역할을 한 것이 적지 않다. 저소득층 이민 1세대 노인들이나 장애인, 병약자들에게 재활서비스를 제공하는 한인건강정보센터(KHEIR)가 대표적이다. 연간 약 500만달러의 연방정부 예산을 지원받는 이 기관은 1980년대 중반 지미 한 LA 시장의 아버지이자 LA 카운티의 유력 정치인이었던 케네스 한을 김영옥이 설득해서 만든 것이다.

◇ 나치 독일 상대로 싸운 미군 일본계 병사들도 지휘... 독립운동가 아들의 아이러니한 운명

김영옥은 퇴역 후 미국 최대 구호기관인 ‘유나이티드 웨이(United Way)’ LA 지부 이사로 있으면서 코리아타운청소년회관(KYCC)도 일궜다. 이는 현재 동포 2세 청소년을 위한 대표적 기구로 자리 잡았다. 전쟁 중 여성이나 전쟁고아들을 보살피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했던 김영옥은 전역 후에도 이 노력을 이어갔다. 그는 1980년대 중반 LA 일원의 가정폭력 피해여성 보호소 이사장을 10년간 맡으면서 이 기관을 아시아·태평양계 가정폭력 피해여성과 그 자녀들을 위한 대표적 피난처로 키웠다. 현재 이 기관은 캘리포니아주 최대의 가정폭력 피해여성 보호소로 발전했다.

김영옥은 전역 후 2차대전의 전장에서 함께 피를 흘린 일본계 미국인을 위한 봉사활동도 하면서 재미동포와 일본계 커뮤니티의 또 다른 거멀못 역할을 했다. 2차대전 당시 그가 이끈 일본계 병사들로 구성된 100대대는 잇따른 승전보가 타전되면서 미국의 아시아 커뮤니티, 특히 적성 시민으로 분류돼 차별받던 일본계 이민자들에게는 희망이 됐다. 2차대전 당시 미국 정부는 일본계의 충성심을 의심해 일본인 이민자 12만명을 격리수용했는데, 일본계 2세 2만명은 미군에 입대해 용감하게 싸우며 자신들의 충성심을 입증해냈다.

이 가운데 유럽으로 나가 나치독일을 상대로 싸웠던 일본계 병사들을 지휘한 한국계가 김영옥이었다. 한일병합 후인 1916년 김영옥의 어머니가 미국으로 유학갈 때 일본 여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 당국이 김영옥을 일본계로 잘못 분류해 맺어진 인연이었다.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음식은 먹지도 말라고 교육받으며 자라난 김영옥과 일본계 미군 장병들이 만나 제3의 적을 상대로 함께 싸우게 된 절묘한 운명이었다.

김영옥이 퇴역 후 숨져간 일본계 병사들을 위해 한 대표적인 일은 LA 다운타운에 일본계 미군 장병 2차대전 참전기념비를 세운 일이었다. 2차대전 당시의 인종차별과 평등한 사회를 위한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는 민권운동기념비이기도 한 이 참전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김영옥은 건립위원장을 맡아 동분서주했다. 이 기념비 앞 부속건물에는 재미 일본인 사회가 ‘건립위원장 김영옥 대령’이라고 새겨넣은 작은 동판이 붙어 있다. 한우성씨는 “일본계는 김영옥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받아들이고 그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했는데 그 정도가 사교집단의 교주 수준”이라고 했다.

2003년 프랑스 정부가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할 때 김영옥이 수상 장소로 꼽은 곳도 이 기념비 앞이었다. 당시 수상식 때 김영옥의 죽마고우이자 한민족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다이빙) 2연패의 주인공인 새미 리 박사는 축사를 통해 “영옥이 없었다면 나의 올림픽 금메달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색인종은 수영장 출입도 금지하던 때 김영옥이 이끄는 일본계 부대의 희생과 활약 덕분에 미국의 아시아계에 대한 차별이 완화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영옥은 일본계 커뮤니티를 위해 봉사하면서도 일본의 잘못을 지적하는 멘토 역할도 했다. 1999년 캘리포니아 주의회가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요지의 결의안을 통과시킨 이면에도 김영옥이 있었다. 이 결의안을 만든 일본계 3세 마이클 혼다 캘리포니아 주의원에게 당시 일본계 사회가 결의안 철회의 압력을 가했을 때 일본계 지도자들을 설득해 이 결의안을 지지토록 한 게 김영옥이었다. 한우성씨는 “혼다 의원은 최근에도 직접 만나면 김영옥을 자신의 멘토라고 한다”고 했다.

한국전 당시 고아원 ‘경천애인사’를 지원하며 숱한 전쟁고아들을 돌봤던 김영옥은 전시에는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였지만 평화 시에는 인도주의자였다. 2003년 사회공헌을 인정받아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을 때 그의 일성은 “한국전쟁 때 돌봤던 고아들을 보고 싶다”였다. 한우성씨는 “김영옥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실제 그가 돌봤던 전쟁고아들이 이미 노인이 돼 뒤늦게 연락을 해오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김영옥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가 1963년부터 1965년까지 한국군 군사고문을 맡아 한국군 전시동원 계획을 재편하고 한국군 최초의 미사일 부대를 창설한 것도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이었다. 1999년, 한국전쟁 초기 노근리에서 미군이 한국인 피란민을 대량 학살했다는 AP통신 기사로 촉발된 노근리사건 당시 김영옥은 미국 정부가 구성한 고위급 진상조사단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해 미군의 잘못을 밝히는 데도 앞장섰다. 숱한 전장을 누비며 전쟁의 참상을 누구보다 많이 겪은 그는 또 다른 의미의 평화주의자였다.

영웅 부재 시대에 김영옥 같은 영웅의 이야기가 많이 알려질수록 우리 사회 통합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한우성씨의 말이다. 예컨대 한씨가 참가하고 있는 ‘김영옥의 친구들’이라는 모임에는 학자, 교육자, 정치인, 언론인, 공무원, 기업인, 법조인, 회사원, 군인, 경찰관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김영옥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만나고 있다고 한다. 이 모임에 참가하는 민주당 이미경 의원은 2006년 여야 의원들과 함께 김영옥 태극무공훈장 서훈 지지운동을 하다가 김영옥이라는 인물을 알게 됐다. 이 의원은 “김영옥 대령은 전쟁영웅을 넘어 인도주의자로서 귀감이 될 인물”이라며 “김영옥을 더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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