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처음 가보는 나라에서는 가능하면 그곳의 오래된 시장과 공동묘지를 일정 중에 포함하려 한다. 삶이 일어나는 곳이 시장이고, 그 삶이 끝나는 곳이 무덤이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는 바로 시장과 무덤이 최고의 장소이다. 영국의 공동묘지는 시내 중심이나 주택가에 있어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다. 거기에 가면 먼저 지나간 삶들의 각기 다른 사연들과 마주치게 된다.

정말 별별 사연을 담은 묘비와 장식물들을 보며 한동안 돌아다니다 보면 마음이 정리가 되고 머리가 깨끗해진다. 평소에도 삶의 방향을 잃을 때면 가끔 근처 공동묘지를 간다. 그러다가 묘비에서 때때로 유명한 사람의 아는 이름을 발견하곤 한다.

런던 캔살그린 공동묘지에 서있는 사회개혁가 로버트 오언과 70여명의 다른 개혁가들을 기린 기념비.

서부 런던 캔살그린 공동묘지(Kensal Green Cemetery)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국의 공상적 사회개혁가 로버트 오언(1771~1858)의 기념비를 우연히 발견하는 즐거움을 맛본 적이 있다. (오언이 일군 스코틀랜드 뉴래너크 공동체는 지난 10월 7일자 주간조선에 현지르포로 소개한 바 있다.) 공동묘지 중간에서 붉은 화강암으로 만든 이집트 오벨리스크 모양의 오언의 기념비가 빅토리아 여왕 시절의 영국 개혁가 70명을 기리는 기념비와 함께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당시 오언의 값진 삶을 안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감동이 미처 안 가신 시점이라 더욱 반가웠다.

오언의 기념비는 비국교도(非國敎徒) 지역 묘지 한가운데에 정말 생뚱맞게 ‘우뚝 솟아’ 있었다. ‘생뚱맞다’라는 이유는 기념비가 주위의 죽음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장소에 서 있다는 뜻이다. ‘우뚝 솟았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주위의 나지막한 묘비와 장식물에 비해 이 두 기념비만 특별히 높기 때문이다. 흡사 주위의 무덤들을 대표로 기리는 듯한 모습이다. 캔살그린 공동묘지의 다른 묘비나 장식물은 런던의 ‘7대 공동묘지(Magnificent Seven)’ 중 하나답게 모양도 갖가지이고 크고 화려하다. 영국이 가장 잘살던 빅토리아 여왕 시절인 19세기 중엽의 탐미적인 사회 분위기와 유행을 반영한다. 묘지 장식이 대부분 예술품처럼 만들어져 있거나 기이해서 런던 관광코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로버트 오언

오언의 기념비는 빅토리아 시대 제본업자이자 제지업자인 조셉 코필드에 의해 오언 사망 21년 후인 1879년에 그의 빛나는 평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그 옆에 있는 개혁자들의 기념비도 코필드에 의해 8년 뒤에 건립되었다. 코필드는 빅토리아 급진개혁가들의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삶에 매료되어 사재를 털어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 새겨진 개혁가들의 노력으로 당시 영국사회가 많이 개혁된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기념비를 사람들이 다니는 큰길가나 광장 같은 공공장소에는 세울 수가 없었던 듯싶다. 이런 후미진 공동묘지 한구석에 세웠으니 말이다.

캔살그린 공동묘지는 이 기념비에 이름이 새겨진 개혁가들과 특별히 관련이 있는 곳도 아니다. 기념비의 중심인물인 로버트 오언의 무덤은 그의 고향 웨일스 뉴타운에 있고 그가 세운 이상향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근처의 뉴래너크에 있다. 이들 개혁가 모두 시대를 거스른 환영받지 못하는 대표적 인물들이라 공공장소에는 기념비를 세울 수 없어서 당시로는 첫 사립 묘지인 이곳에 돈을 주고 터를 사서 세울 수밖에 없었다.

오언의 기념비에는 그의 생애의 업적이 간단하게 적혀 있다. 처음으로 아동 교육을 위한 유아원을 발상해 설립했고, 여성과 아동의 노동시간을 줄이고 국가적 규모의 국민 교육을 주장했다고 밝혔다. 또 노사 조정을 통한 교육으로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의 갈망을 드높였다고 새겨져 있다. ‘그의 생애는 인간애와 고상한 노력으로 성화되었다’라는 코필드의 글이 한쪽에 새겨져 있다. 다른 면에는 오언의 중요한 활동상도 예시해 놓았다.

오언의 기념비 옆에는 빅토리아 시대 개혁가 70명의 이름이 아래와 같은 헌사와 함께 새겨져 있다.

“사회의 모든 계급 사람들의 생활과 행복을 향상시키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재산을 기꺼이 바친 용감한 남녀들의 영광을 위해 이 비를 세운다. 이들은 모든 사람들이 같이할 때 보다 더 행복하고 부유하게 됨을 느끼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진정으로 노력했다. 언론의 자유를 압박하던 무자비한 오랜 악법이 사라짐과, 우리들의 대표를 선출하는 권리는 이들의 노력으로 주로 이루어졌다. 이런 권리행사의 경험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규제하는 법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이게 만들었고 그 결과로 그들을 보다 나은 인간과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존 스튜어트 밀

기념비에 이름이 새겨진 70명의 개혁가는 각기 다른 배경과 생애를 갖고 있다. 빅토리아 시대의 거의 모든 사회개혁가들의 이름이 총망라되어 있다시피 하다. 명문가 출신은 별로 안 보이고 한둘의 부유한 집안 출신은 있지만 대개가 보통의 중산층과 제화공 혹은 탄광 노동자 같은 하류층 출신이다. 알 만한 이름은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 정치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 화가 겸 저술가 윌리엄 모리스 등을 포함해 서너 명밖에 안 된다. 거의가 별로 이름 없는 평범한 출신의 개혁가들이다.

심지어는 인터넷상으로 경력이나 생애가 전혀 조사가 안 되는 인물도 10명이나 된다. 이렇게 후세에 이름만 전해질 뿐 활동 내용마저 안 알려져 있는 인물이 많지만 개인 한 명 한 명의 생을 살펴보다 보면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다. 제혁공 출신 아브람 콤브, 탄광 노동자 알렉산더 맥도날, 제화공 조지 오저, 봉제공 사라 마틴처럼 자신의 삶도 가누기가 힘들던 빅토리아 시절 이름도 모르고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동료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친 인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 개혁가도 영국 유명작가 바이런의 부인 노엘 바이런을 포함해 10명이나 된다. 여성의 사회참여를 상상할 수도 없던 시절이어서 여성 개혁가들의 활동은 더욱 힘들었다.

여성 관객이 거의 없던 빅토리아 시절 지어진 런던 시내 극장들의 경우 여성 화장실이 아주 적어 지금도 휴식시간에는 줄이 길다. 그런 시절 이들은 특히 여성 평등권, 참정권 획득을 위해 노력했다, 그중에는 창녀들의 권익 개선에 힘쓴 조세핀 버틀러 같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개혁에 몸바친 여성 개혁가도 있다. 개혁가들의 활동 내용도 다양하다. 당시 사회의 온갖 부조리를 개선하고 제도를 개혁하고자 이들이 관여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다. 노동자 권익개선, 선거권, 참정권, 언론자유, 교도소 개혁, 노예제도 폐지, 교육제도 개선, 정치개혁 등의 분야가 주로 많다.

개혁가들의 면면을 살피다 보면 몇 가지 공통된 특성이 발견된다. 첫째, 거의가 다 제도권 밖 출신이다. 정치인이나 성직자 같은 제도권 운동가는 많이 없다. 그래서 기존 사회의 권위와 제도에 도전하다시피 하면서 거의 투쟁과 같은 헌신으로 개혁을 이끌었다. 다음으로 이들은 비(非)생계형 비(非)전문 운동가들이다. 당시 국회의원도 그렇긴 했지만 이들은 이런 개혁운동을 생계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았다. 자신의 활동을 통해 개인적 이득을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생업을 포기해 가면서 심지어는 감옥에 갇히면서까지 개혁을 했다.

이런 운동에는 자금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는 지금처럼 대중적인 모금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니 정말 '자신의 시간과 재산을 바쳐' 가면서 개혁을 했다. 다음이 퀘이커(Quaker) 신도가 많다는 점이다. 당시 지식인 사이에는 퀘이커 신도가 많았다.
 
많은 퀘이커 신도들이 당시 노예를 소유하지 않았던 데서 알 수 있듯이 퀘이커들은 시류에 비해 대단히 진보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죄수 인권과 복지 문제, 노동자 권익, 정신병원 제도 개선, 여성 참정권, 공민교육, 빈민 구호사업 등과 같이 영국 국교에서는 별로 신경을 안 쓰는 사회문제 개혁이 퀘이커들이 추구하는 공동선이었으니 개혁가들과 행동반경이 같을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개혁가들 중에는 퀘이커가 많았다. 또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발간으로 불붙은 진화론 때문에 더욱 늘어난 여러 가지 형태의 무신론자 중에도 개혁가가 많았다. 마지막으로 개혁가 기념비의 인물들 대부분은 오언의 추종자나 동조자들이다. 그래서인지 개혁가 기념비 명단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오언의 이름이다. 그렇게 보면 이 두 개의 기념비는 결국 로버트 오언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셈이다. 로버트 오언의 개혁이 얼마나 영국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거의 200년 전의 빅토리아 사회는 현재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제도가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기독교 사상과 완벽하게 배치되는 노예제도가 상당히 많은 지도층 인사들의 주요 사업이었을 정도니 말이다. 사회개혁가가 주장하는 노예제도 폐지는 그런 사람들의 삶의 기반을 흔드는 일이었다. 당연히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개혁가들은 그들의 증오의 적이었다. 뿐만 아니다. 결사의 자유가 없던 시절 노동자들을 꼬드겨 노동자 권익 쟁취를 위해 노동조합 결성을 추진하던 개혁가들 또한 사업가들의 밥그릇을 뺏어가는 사람들이었다. 완전한 언론의 자유나 양심의 자유는 200년이 지난 지금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자유인데, 당시에 그런 자유를 앞서서 외친 이들 개혁가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으리라는 것은 상상만 해도 알 수 있을 듯하다.

이들은 사회개혁운동을 자신들의 사회적 책무의 하나로 봤다. 개혁가들을 정신적으로 무장시킨 사상은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계몽주의였다. 간단히 얘기해서 우매한 민중을 교육하지 않고는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방법이 없다는 계몽주의는 당시 기독교 사상을 대치할 또 하나의 종교였다. 개혁가들은 사명감에 불타 자신들의 사재를 털어 넣으면서까지 개혁에 매진했다. 예를 들면 저술가, 화가, 디자이너, 사업가, 발명가인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르네상스맨 윌리엄 모리스는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사회주의자 단체의 결성 취지가 국민교육에 있어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코몬윌이라는 월간지를 1885년에 만든다. 그는 이를 위해 매달 1만5000파운드를 부담했다. 이렇게 개혁가들은 수많은 단체를 만들고 신문, 잡지, 팸플릿을 만들어 개혁운동을 했다. 그중에도 특히 노동자 권익과 관련한 차티스트운동이 사회개혁에 끼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차티스트운동은 노동자의 처우개선을 외치는 다른 노동운동과는 달리 노동자의 참정권 획득이 운동의 주요 핵심 목적이었다. 참정권이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합법적인 제도 개선이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모든 역량을 참정권 획득에 둔 것이다. 이런 차티스트운동에도 윌리엄 모리스를 비롯해 수많은 개혁가가 참여했다.

이렇게 영국의 사회개혁 선구자들은 불타는 사명감을 가진 개인들이었다. 또 이런 개혁자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운 조셉 코필드도 개인이다. 코필드가 어떤 어려운 과정을 거쳐 기념비를 세웠는지, 또 그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냥 빅토리아 시대 한 개인이 민중의 삶을 개선한 개혁가들에 대한 고마움에 못 이겨 그들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 기념비마저도 대중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공동묘지 한구석에 위치해 있어 코필드의 희망이 별로 빛을 못 보고 있는 듯하다.

런던 시내에는 수많은 인물의 동상과 기념비가 있다. 영국 역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거의 빠짐없이 있다고 봐야 한다. 2차대전 중에 군수물자를 생산한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기념탑도 있고 군인의 경우는 포병, 기마병, 전폭기 조종사같이 병과별로 따로 다 기념비가 있다. 심지어는 참전한 말을 기리는 동상도 있다. 그런데 아직 이 개혁가들에 대한 기념비는 런던 시내에 없다. 캔살그린 공동묘지의 개혁가 기념비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개인별 연고에 따라 지방에나 한두 개의 기념비가 있는 정도다. 이들 제도권 밖 개혁가들은 아직도 제대로 대접을 못 받고 있는 셈이다.

사회개혁가를 기리는 이런 종류의 기념비를 다시 본 곳은 스위스 제네바이다. 기독교 개혁가 요한 칼뱅이 세운 제네바대학교 교정에 있는 ‘개혁가의 벽(Mur de la Rformation)’이라 칭해진 기념물이 그것이다. 주로 유럽 개혁가들의 인물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캔살그린의 개혁가 기념비에는 비제도권 인물들이 적혀 있는 데 비해 제네바 개혁가 벽에는 제도권을 기반으로 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종교계와 정치개혁가 10명이 들어 있다. 요한 칼뱅, 존 녹스 같은 주요 종교 개혁가와 왕권신수설을 주장한 영국의 찰스왕을 처형한 올리버 크롬웰 장군과 스페인에 맞서 네덜란드 독립을 이끈 ‘오렌지왕’ 같은 정치적 인물이 새겨져 있는 점이 다르다.

30만㎡(9만평)의 캔살그린 공동묘지는 주택가 한가운데 있다. 1833년에 개장된 이후 지금까지 6만5000개의 묘지에 25만명이 묻혀 있다. 캔살그린 공동묘지에 가보면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런던의 공동묘지들은 실내 묘지로 가득 찬 웨스트민스터사원과 함께 주요 관광코스 중의 하나이다. 거기에는 캔살그린 공동묘지처럼 진정이 담긴 각기 다른 사연의 묘비와 흥미로운 조각품 같은 묘비 장식물이 많다. 심지어는 수십 명이 들어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크기의 기념물을 가진 개인 무덤도 있다. 런던에는 이런 크고 작은 공동묘지가 51개나 있다. 그중에는 화장터를 가진 곳이 7군데나 된다.

영국인을 비롯해 기독교 유럽인에게 있어 무덤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무덤은 천국으로 가는 정거장이라는 말이 있다.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기독교식 장례식 절차(proper Christian burial)’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믿는다. 성직자 주례의 진혼곡이 울려 퍼지는 미사를 통한 장례식을 치러야 제대로 된 장례식이다. 아기가 태어나도 영세를 하지 않고, 결혼식도 성당에서 하지 않으면서, 굳이 장례식은 성당에서 하고 교회묘지에 묻힌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국교회 신도가 아니거나 범죄자, 자살자 같은 교리에 어긋나는 사람은 교회묘지에 매장될 수가 없었다. 공동묘지마저도 국교도와 비국교도 지역이 구분돼 있었다. 기독교도들은 죽음을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으로 본다. 부활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 화장이 일반화되기 전까지는 매장이 기본이었다. 그런 의미로 묘지는 주거공간 근처에 두었다. 영국에서 주택지 한복판에 화장터를 가진 공동묘지를 보는 일은 특별한 게 아니다. 묘지가 그렇게 피해야 할 장소가 아니라는 뜻이다. 최근 들어 기독교의 쇠퇴로 문을 닫은 성당을 주택업자가 구입해서 내부를 아파트로 개조해 분양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 교회묘지를 그대로 두어 아파트의 앞 정원이 아직도 묘지인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아파트 지하에 교회 지하묘지(crypt)를 그대로 남겨 놓는 곳도 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 이렇게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닌가 보다. 이렇게 생활 가까이에 있는 영국 묘지는 일 년에 한 번 성묘 때나 가는 곳이 아니다. 죽은 이를 기리는 가족이 있는 무덤에는 생화가 많이 놓여 있다. 무덤이 결코 잊혀지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영국인의 효심이나 가족애가 일 년에 한 번 성묘 가는 한국인보다 더 진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 더 많은 기사는 2013년 10월 21일 발매할 주간조선 2278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