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항상 틀릴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의 판단은 말할 것도 없고, 과학자의 이론이든, 재판관의 판결이든, 철학자의 주장이든 틀릴 수 있다.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어떤 지식도 불가능하다는 회의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 계속적인 비판적 논의를 통해 점진적으로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
이것은 20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철학자이면서, 전체주의에 맞서는 '열린사회'의 주창자로서 더욱 유명한 철학자 칼 포퍼(Popper· 1902~1994)의 주장이다. 지식 문제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와 역사를 포괄하는 그의 광범위한 학문적 성취는 유대인으로 태어나 격동의 시대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빈(Wien) 대학에서 물리학과 철학을 전공하던 시절, 오랫동안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던 빈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공산주의 혁명의 불길이 휩쓰는가 하면, 이에 대항해서 나치즘의 광풍이 몰아쳤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한때 마르크스주의에 동조하여 학생 사회주의 협회에 가입하였으며,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당원이 되기도 했다. 이런 체험은 나중에 전체주의 비판에 큰 도움이 된다.
그의 철학은 이성의 오류 가능성과 이를 수정하는 비판적 논의에서 출발한다.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단지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추측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그 추측이 엄격한 비판을 잘 견뎌낸다면, 이것은 그 추측을 지지할 충분히 합리적인 이유가 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지적 겸손과도 닮은 이런 태도를 그는 비판적 합리주의라 부른다.
이런 논리에서, 그는 과학이나 이론도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독단적으로 주장할 때 사이비 과학이 된다고 본다.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이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이런 유형이다. 이들은 절대적 진리라기보다는 오히려 점성술에 가깝다. 반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언제나 틀릴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참된 과학적 가설이 된다. 비판의 가능성과 반증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아직 반증되지 않은 가설일 뿐이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반증주의 과학관이다.
그의 '열린사회' 개념도 이런 비판적 태도의 연장선상에서 형성된 것이다. 뉴질랜드의 캔터베리 대학에서 과학철학을 강의하던 1938년 봄, 그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그는 나중에 세계적 명저가 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쓰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는 플라톤을 읽기 위해 고대 그리스어를 독학으로 마스터하는 집념과 전투에 임하는 자세로 이 책을 집필했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전체주의적 '닫힌사회'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추구하는 '열린사회' 간 투쟁으로 본다. 열린사회는 운명적인 역사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자신의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과 똑같이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회이다.
그의 열린사회는 부분적으로 사회를 변혁해 나가자는 점진적 사회공학을 함축한다. 그가 화려한 청사진을 설정하고 단번에 이를 실현하려는 유토피아 사회공학을 거부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혁명적 유토피아주의는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추상적 선(善)의 실현보다 구체적 악의 제거에, 그리고 행복의 극대화보다는 고통의 극소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우리 시대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도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은 사회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행복한 시대라고 진단한다. 런던 정경대학에서 수많은 제자를 기르면서 타계할 때까지 그가 누린 세계적 명성이 이런 판단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가 일생 대결했던 전체주의 사회의 붕괴가 이런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금수(禽獸)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으로 남고자 한다면 열린사회로 가는 길뿐이다."
[포퍼를 더 알고 싶다면]
오랫동안 금서 목록 올랐던
대표작 '열린사회와 그 적들'
가볍게 읽으려면 자서전 추천
포퍼의 저서는 수십 권이 넘지만, 가장 중요한 과학철학서로는 '추측과 논박'과 '객관적 지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포퍼 과학철학의 정수를 나타내는 논문 모음집이다.
사회 정치철학 분야의 대표적인 책으로는 역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필자가 포퍼의 책 중에서 가장 먼저 번역했던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금서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1983년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열렸던 세계철학 대회에서 필자는 포퍼와 대화를 나눴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한국어로 번역했다는 이야기를 하자, 자그마한 체구의 그가 "이미 오래전에 수많은 나라에서 번역되었는데…" 하면서 인자하게 웃던 기억이 새롭다.
이런 책들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된다면 그의 자서전 '끝없는 탐구: 내 삶의 지적 연대기'나 '더 나은 세상을 찾아서'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