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마드리드의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하는 호르헤(32)의 하루는 9시 출근으로 시작한다. 아침에 두 시간 정도 일하다 보면 어느새 메리엔다(간식)를 즐기는 11시. 보카디요(스페인식 샌드위치)에 커피를 마시며 동료들과 한 시간가량 수다를 떤다. 2시부터는 점심이다. 호르헤는 보통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는다. 아버지까지 온 가족은 어머니가 준비한 스페인식 풀코스 오찬에 와인을 곁들여 먹는다. 공식적으로 점심시간은 4시까지지만 동료들은 밥 먹고 한숨 자고 보통 4시 30분쯤 일터로 돌아온다. 오후 업무를 마치는 시간은 대략 7시. 아직도 해가 지지 않아 환하다. 동네 바르(술집)에서 타파스(안주)와 맥주를 마시며 축구경기를 본다. 퇴근 후 저녁식사는 다시 집에서 10시쯤. 잠자리에 들면 1시가 넘는다. 금요일엔 오후 3시에 퇴근하고 바로 주말이 시작된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한산한 점심 거리 풍경. 많은 상점이 시에스타를 포함해 2시간이 넘는 점심시간에 문을 닫는다. 스페인 정부는 경제위기 탈출을 위해 현재 사용 중인 중부유럽 표준시(CET)를 한 시간 늦춰 점심시간을 줄이고 시에스타 문화를 없애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호르헤처럼 긴 점심식사와 낮잠(시에스타), 그리고 시끌벅적한 밤 문화를 즐겨왔다. 호르헤는 "놀러나온 사람들로 새벽 2시 도심에 차가 막히는 나라는 우리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경제위기가 불거지면서 한때 외국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스페인식 라이프 스타일'이 된서리를 맞고 있다.

스페인 정부는 경제위기 탈출을 위해 현재 사용 중인 중부유럽 표준시(CET)에서 한 시간을 늦춰 영국의 그리니치 표준시(GMT)에 시간대를 맞추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스페인 의회 '근로시간 합리화 위원회'는 "점심시간을 줄이고 시에스타를 없애 스페인 비즈니스 문화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야 한다"며 "근로자들은 근무시간을 엄수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위원회는 이 같은 내용의 권고안을 다음 달 3일 의회 표결에 부치기로 했다.

위원회는 스페인이 지난 71년간 독일 시간대를 사용해 태양의 움직임과 사람들 일상 사이에 불일치가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원래 스페인은 영국과 같은 GMT를 사용했으나, 히틀러와 친밀한 관계였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1942년 시간대를 독일처럼 CET로 바꿔버렸다. 따라서 스페인 국민은 해가 뜨기 전부터 일어나 출근하게 됐고, 금방 피로를 느껴 시에스타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자연히 점심시간은 두세 시간씩 늘어졌다. 특히 여름엔 밤 10시까지 해가 떠있다 보니 늦게까지 밀린 업무를 하거나 바깥 활동을 하는 패턴이 자리 잡았다. 근무 중간 긴 휴식이 많아 노동 집중력과 생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식당과 상점들도 소비 패턴에 맞춰 밤늦게까지 연다. 일하느라, 노느라 사람들은 새벽 2시쯤 잠자리에 들기 일쑤다. 이러다 보니 스페인 국민의 평균 수면 시간은 세계보건기구(WHO) 권고 기준보다 한 시간 적다고 위원회는 밝혔다. 위원회 소속 누리아 친치야 교수는 스페인이 "잘못된 시간을 따름으로써 근로자들이 '상시적 피로'에 빠져 일터와 가정 모두에 악영향을 미쳤다"며 이혼율 상승과 대학진학률 저하도 여기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스페인 국토의 대부분은 국제 표준시각의 기준이 되는 본초자오선보다 서쪽에 있다. 수도 마드리드는 런던보다 255㎞ 더 서쪽이다. 스페인과 경도(經度)가 비슷한 포르투갈과 모로코는 GMT를 쓴다.

스페인 시민들 반응은 엇갈린다. 하비에르 히메네스 IESE 경영대학원 교수는 "시에스타는 한여름 폭염을 피해 일하던 농경제 시대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이미 1980년대부터 글로벌 기업들이 진출하면서 근무시간이 엄격하게 준수되고 있다"고 말했다. 마드리드 시민 에두아르도(33)는 "일자리 구하기도 힘든데 요즘 누가 낮잠을 자느냐"며 "정치인들이 또 자기네 공적을 쌓으려고 하는 짓"이라고 말했다. 스페인어 강사 마리아(30)는 "단지 시간대 변경으로 이미 뿌리내린 관습이 얼마나 바뀔지 의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