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 TPP)에 참가하기로 가닥을 잡은 배경에는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무역 질서가 재편되는 세계경제 트렌드를 감안한 전략적 판단이 깔려있다. 아시아를 무대로 미국과 중국이 안보·경제 문제로 충돌하는 상황에서 중국과는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고, 미국·일본과는 TPP를 체결해 균형을 맞추겠다는 의도라는 분석도 나온다.
◇일본 TPP 참가로 분위기 달라져
이명박 정권에서도 TPP 가입을 검토했지만 당시에는 "때가 아니다"는 의견이 많았다. 정부 관계자는 "한·미 FTA를 체결한 상태에서 다시 미국이 주도하는 TPP에 참여해봐야 실익(實益)이 없다는 판단이 우세했다"고 말했다. TPP 참가국 가운데는 농산물 수출국이 많아 농산물 시장 추가 개방에 따른 국내 반발이 클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했다.
미국 주도의 TPP에 대해 중국이 거부감을 표현해 온 것도 한국 정부가 TPP 가입에 조심스러운 이유였다. 정부는 지난해 말 TPP에 대응해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이 주도하고 중국이 지원하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RCEP)에 참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출범 후에는 경제·통상 관련 부처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했다. 가장 큰 전환점은 지난 3월 일본이 TPP 참여를 공식 선언하면서부터다. 박천일 무역협회 통상연구실장은 "일본이 TPP에 들어감으로써 FTA 경쟁에서 단번에 한국을 따라잡고, 나아가 TPP 참가국 가운데 한국과 FTA를 맺지 않은 멕시코, 캐나다 등 4개국에서 우리보다 경쟁력이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가 생겼다"고 말했다. 미국·일본이 TPP를 통해 기술 표준 등 각종 국제규범을 만들어 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TPP를 '중국 포위망'으로 인식했던 중국이 자국의 참여 가능성을 열어 놓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도 우리 정부의 판단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중국 상무부 대변인은 지난 5월 30일 중국의 TPP 협상 참여 여부에 대해 "참가의 장단점, 가능성을 분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 날에는 중국 외교부도 "TPP 교섭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 정부 고위 관계자는 "시점이 문제일 뿐 TPP에 참여해야 한다는 원칙은 이미 세워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무역협회 등도 "최대한 빨리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중·일 FTA, RCEP는 힘 빠질 듯
한국이 TPP 참가를 공식 선언할 경우 동아시아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외교 면에서도 파장이 예상된다.
우선, 한국이 오바마 정부의 '동아시아 중시 정책'의 '경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TPP에 가입함으로써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김영귀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지역통상팀장은 "최근 중국이 TPP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긴 하지만 한국이 TPP에 참여할 경우 중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경제 통합 논의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를 가지고 있다"며 "TPP 참여에 앞서 중국과 구체적인 협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TPP 참여로 고립 위기를 느끼는 중국이 한·중 FTA 협상에 속도를 올릴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현재 양국 관계가 냉각된 일본과는 TPP를 계기로 협력이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한·중·일 FTA나 RCEP 등 한국이 참여하는 지역 차원의 다자간 FTA는 모멘텀을 잃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한·중·일 FTA는 각 국가 간의 이견이 크고, TPP 참여를 선언한 일본이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크지 않다. 미국이 이끌고 가는 TPP와 달리 RCEP는 중심 추진국이 없고, 참가국의 상당수가 TPP에도 참여했거나 참여를 검토하는 상태다.
한국이 TPP에 참여하려면 미국뿐만 아니라 기존 참여국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미국 정부는 무역대표부 관리들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도 TPP에 참가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공식 외교 채널로 한국에 TPP 참여 요청을 한 적은 없다"(정부 관계자). 박천일 무역협회 통상연구실장은 "현재 TPP 협상에서 미국과 동남아시아 국가 간의 이견이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성공적인 FTA 경험이 있는 한국을 파트너로 참여시켜 이들에 대한 설득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 TPP(Trans-Pacific Partner shi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미국 주도로 일본·캐나다·베트남 등 12개국이 상품·서비스·투자·노동 및 환경 등 29개 분야에서 협상을 하고 있는 거대 자유무역협정(FTA). 현재 12개 참가국의 경제 규모를 합칠 경우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세계경제의 38%(27조달러)를 차지해 유럽연합(17조달러)보다 더 큰 시장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