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0월 1일 개교 100주년을 맞는 서울맹학교는 김기창(67)씨의 모교다. 사람들은 그를 서울맹학교의 산증인이라고 부른다. 아홉 살이던 1955년 서울맹학교에 입학해 초등·중등·고등부를 졸업했다. 70년 3월엔 이 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95년에 교감이 됐고, 99년에 교장으로 임명됐다. 6대 교장 이종덕씨 이후 시각장애인으로는 두 번째 교장이었다. 서울맹학교 졸업생으로 연세대 교육학과를 나와 미국 피바디대학원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은 김영일 조선대 교수는 "김기창 선생이 안 계셨더라면 오늘의 서울맹학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2007년까지 8년간 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낙후된 맹학교의 시설이 크게 바뀌었다.
서울 종로구 신교동 서울맹학교 교정에서 만난 김기창씨는 "아홉 살 때부터 이곳에서 살아온 셈"이라며 활짝 웃었다. "한 학교에서 학생, 교사, 교감, 교장을 다했으니 애착이 남다르지요. 따져보니 37년 반을 근무했더군요."
6·25전쟁 통에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실명한 1급 시각장애인이지만 그는 숫자와 연도를 외는 데 거침이 없었다. 서울맹학교 100년 역사가 그의 입에서 줄줄이 흘러나왔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조선총독부 재생원 맹아부'였어요. 재생원 원장은 총독부 내무국장이나 학무국장이 겸임할 만큼 중시했지요. 서대문 동명여중 자리에 있다가 신교동 이 자리로 이사온 게 1931년 4월이에요.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살던 선희궁 터랍니다. 벚꽃도 많고 경치가 좋아 소창경원이라고도 불렀대요. 일제가 조선의 역사와 전통을 없애려고 창경궁에 동물원을 만든 것처럼 선희궁 자리에 재생원을 옮겨왔다고도 하지요."
해방 후 국립맹아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59년 서울맹학교와 서울농아학교로 분리됐다. "양쪽 학생들과 직원들 사이 트러블이 많았어요. 농아학생 수가 두 배나 많아서 맹학교가 산 쪽으로 밀려나왔지요. 당시 교장이 시각장애인인 이종덕 선생님이었는데도 말이에요(웃음)."
인왕산 자락에 건물 두 채였던 맹학교의 시설은 형편없었다. "우물이 학교 밖에 있어서 학생들이 물을 직접 길어 날랐어요. 겨울에는 저녁에 미리 물을 길어다가 밤새 미지근해지면 그걸로 아침에 세수를 했지요. 장작 4~5개비로 추위를 이겨내야 했는데, 그래도 그때가 좋았던 것 같아요. 상급생, 하급생 사이 정이 넘쳤죠. 형들이 세수도 시켜주고, 점자도 가르쳐줬고요."
교장이 된 뒤 김씨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낙후된 학교 시설을 개선하는 일이었다. 용산구에 서울맹학교 용산이료전공교육과 건물을 지은 것이 김기창씨다. "주민들 반대가 극심했죠. 기공식을 교문 밖에서 했답니다. 당시 용산구청장이 그러더군요. 앞으로 국제도시가 될 용산에 맹학교가 들어와서는 절대 안 된다고. 다행히 주민들이 낸 건축중지 가처분신청이 각하됐습니다."
본교의 식당과 강당, 기숙사도 현대화시켰다. "종로구청이 증축을 반대했지만 뜻 있는 국회의원들, 교육부와 감사원 공무원들이 도와주셨어요." 중도실명자들을 위한 이료재활과정을 신설하고, 안마·침술 심화전공과정(3년)에서 소정의 학점을 따면 이료전문학사를 따도록 주도한 사람도 김기창 교장이다. "이료전문학사가 되면 일반 대학에 편입해 대학원까지도 진학할 수 있지요."
김씨는 국내 시각장애인 박사 학위 소지자가 27명이라고 했다. 그중 18명이 서울맹학교 출신이란다. 김기창 교장도 그중 한 사람이다. "후배들 앞에 교사라고 섰는데 할 줄 아는 게 안마·침술밖에 없다는 것이 부끄러웠어요. 그래서 1979년에 단국대 야간대학에 들어가 행정학을 공부했지요. 83년엔 특수교육으로 단국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를, 2004년엔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지난해 8월까지는 단국대 특수교육과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요즘 개화기 이후 시각장애인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다. "맹인들의 생활사를 정리해보려고요. 금년 12월엔 완성할 계획입니다."
▲9일자 A31면 '시각장애인 博士 28명 중 18명, 우리 학교 출신' 기사에서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어머니가 아니라 부인이므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