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베스트셀러 1위에서 몇 단계 하락하자 또 한 권의 하루키 책이 출간됐다. '하루키' 하면 연상되는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1987년 작)'이 다시 번역된 것이다. 사실 그 사이 나온 하루키 책이 한 권 더 있다. '빵가게를 습격하다'란 책이다. 1981년과 1985년 작품을 다시 편집해 출간한 것이다. 하루키만이 아니다. 한국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히가시노 게이고, 요코야마 히데오, 미야베 미유키와 같은 일본 작가의 작품이 늘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하루키의 이번 신간들에는 약간의 공통점이 있다. '색채가…'와 '노르웨이의 숲'을 번역한 양억관씨와 '빵가게…'를 번역한 김난주씨가 부부라는 것이다. 경희대 국문과 선후배인 양억관·김난주 부부는 1980년대 일본에서 함께 유학하다가 결혼했고, 지금은 함께 일본문학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양억관의 번역 작품이 경파(硬派)에 가깝다면 김난주의 번역 작품은 연파(軟派)에 가깝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일본 소설을 읽은 독자들에게 좀 더 낯익은 이름은 '김난주'다. 그가 번역한 하루키의 1985년 작품 '일각수의 꿈(원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은 일본 소설 열풍의 도화선 역할을 한 몇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된다. 양억관·김난주 부부에게 국경과 역사 문제를 뛰어넘어 한국 독자들에게 변함없는 인기를 유지하는 일본 소설에 대해 물었다.
―일본 문학의 다양성에 대해.
(김난주) "일본에서 공부하는 동안(1980년대) 일본 현대문학을 한 권도 안 읽었다. 고대에서 시작하는 대학 수업이 현대소설까지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겨우 제대로 다뤄야 가와바타 야스나리(일본의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 정도였다. 그런데 교수와 학생이 방담 수준에서 수업 시간에 하루키의 소설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난 그때 하루키 이름도 몰라 어리둥절하면서 소외됐던 기억이 있다. 학업을 마치고 첫아이를 키울 때 비로소 하루키 소설을 읽었다. 세계의 끝이 어쩌고… 하는. 아, 너무 재미있었다. 난 한국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는데, 우리 문학에선 읽을 수 없었던 구성력을 발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재적인 이야기꾼의 책이었다. 그래서 번역을 시작했다."
―이야기꾼이라고 했는데, 전통적으로 일본엔 '이야기'가 많다.
(양억관) "도요대(東洋大) 설립자인 이노우에 엔료는 일본 각지를 돌면서 요괴 이야기만 모아 대가(大家)가 됐을 정도다. 일본에 '이야기'가 많은 이유는 예부터 공동체가 파괴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에선 수많은 전란이 일어났지만, 전쟁이 생산 기반인 일반 백성까지 건드리지는 않았다. 고도산업사회가 되면서 많이 해체되긴 했지만 1950·60년대까지 일본 사회에 공동체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안의 이야기가 유지되고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김난주) "문학의 층(層)도 두껍다. 장르라고 해야 하나? '관능(官能)소설'이란 장르까지 있으니. 19금(禁), 글로 쓴 포르노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이 장르까지 지금 한국에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1990년대부터 일본 소설이 인기를 끌었는데.
(양억관) "'일각수의 꿈'이 한국에서 번역된 것은 1992년이다. 일본에서 출간된 지 7년 만의 일이다. 그 후 일본 소설 열풍을 일으킨 작가 중엔 1970년대부터 인기를 끈 사람들이 많다. 그동안 일본 현대소설이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건 당시 '반일(反日) 정서'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난주) "1990년대부터 일본 소설 붐이 일어난 건 그때 환경과 정서가 비슷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요시모토 바나나(일본의 인기작가)는 요즘 한국 친구들도 모르게 한국에 들어와 이곳저곳 여행하다가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환경이 비슷하니 일본 현대소설의 모던함과 기발한 상상력도 한국 사회가 잘 수용하는 듯하다. 이번에 출간한 하루키의 '빵가게를 습격하다'는 설정 자체가 한밤중에 빵집을 습격하는 엉뚱한 이야기다. 왜 습격하느냐? 그런데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원인이 배고픔인데, 배고픔이란 이야기는 안 한다. 그냥 여러 가지 갈증을 포함한다. 그러다가 폭발하는 것으로. 그런데 습격하는 곳이 왜 빵집일까?"
(양억관) "배가 고파서 습격하는데, (요리에 시간이 걸리는) 야키니쿠 가게보다야, 빵집이 낫긴 하겠지."
(김난주) "아니, 모던함이라니까. 하루키 소설에 야키니쿠 집 같은 곳은 절대 등장 안 해. 굉장히 깔끔하니까. 모든 게 질서 정연하게 정돈돼 있고. 반짝반짝하고. 그런데 화려하지 않고."
(양억관) "그런데 '색채가 없는…'은 그런 소품이나 치장보다 인간의 관계성을 중시한 듯하다. 과거를 더듬는 이야기잖아. 나중에 도달한 결론은 불교식으로 나의 카르마(업보). 결국 내가 존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 과거를 묻어둘 수 있지만, 역사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 이건 일본만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닐까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통하는 것이겠지."
―하루키 소설은 늘 비슷하다는 비판에 대해.
(김난주) "모르겠다. 왜 달라진 모습을 굳이 찾아야 하지? 그냥 작품 자체로 즐기면 되는 것 아닌가? 나는 갈수록 '하루키도 일본 작가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를 확실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양억관) "난 하루키 작품은 지금까지 '일각수의 꿈' '노르웨이의 숲' '색채가 없는…' 이 세 작품만 읽었는데, 이번에 번역하면서 다음 작품은 크게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를 외면하지 않고 극복하는 인물을 설정했으니, 다음엔 생명력이 넘치는 인물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추측이지만."
―'색채가 없는…' 번역에 얼마나 시간이 걸렸나?
(양억관) "정신 바짝 차리고 20일 정도 걸렸다. 작가는 사용하는 용어나 스타일이 비슷하다. 처음 4분의 1이 시간이 걸리지, 그다음은 시간이 안 걸린다. 좋은 작가는 번역하기 편하다. 하루키는 폼 잡는다고 이상한 말을 쓰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일본어가 쉽다고 하지만 일본은 어휘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에 속한다. 번역의 어려움은?
(김난주) "우리말에 없는 뉘앙스가 다른 어휘는 수식어로 보완한다. 그런데 일본어는 어휘가 많은 만큼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군더더기가 많다. 일본어는 (문법의) 자유도(度)도 높다. 그걸 우리 말로 다 주워담으면 글이 지저분해진다. 번역은 문체를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언어의 틀 속에 외국어로 된 내용을 가져오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일대일이 가능하다면 최고이지만 현실적으론 그게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