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이스라엘 교도소 독방에서 '죄수 X'가 숨졌다. 교도관도 그가 누군지 몰랐다. 호주·독일 언론이 두 해 취재 끝에 X의 신원을 밝혀냈다. 호주 태생 유대인으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요원인 벤 지기어였다. 그는 실적을 올리려고 레바논 이중 첩자와 접촉하다 모사드 고위 정보원 둘의 신원을 흘렸다. 두 정보원은 레바논 당국에 붙잡혔고 지기어도 모사드에 체포돼 수감됐다. 지기어가 왜 죽었는지도 의심스러웠지만 이스라엘 당국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논란이 커지자 네타냐후 총리가 말했다. "정보 활동이 지나치게 노출되면 안보가 위태롭다. 안보 인력이 조용히 일해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게 해달라." 정보기관이 해외에 파견하는 요원은 '화이트'와 '블랙'으로 나뉜다. '화이트'는 공관에서 일하며 합법적으로 정보를 모은다. '블랙'은 가짜 직함으로 은밀히 활동한다. '블랙'이 체포되면 파견국은 자기 요원이라는 걸 부인한다.

▶미 CIA 요원 발레리 플레임은 중동의 에너지 컨설팅 회사 직원을 가장한 미모의 '블랙'이었다. 이라크 주재 대사를 지낸 남편이 2003년 신문에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전 명분으로 내건 대량 살상 무기는 없다"고 썼다. 공방이 벌어지면서 플레임이 비밀 요원이라는 사실이 공개됐다. 정보를 흘린 곳으로 백악관이 지목돼 부시 정부는 곤욕을 치렀다. '리크(Leak·누설) 게이트'다.

▶70년대 미 의회와 언론이 '부도덕한' CIA 비밀 조직을 파헤치면서 정보망이 무너지고 요원들이 살해됐다. 그 뒤로 정보원 신원을 누설하면 10년 이하 형으로 벌한다. 우리 국정원도 '무명(無名)의 헌신'을 내세운다. 국정원법에 따라 직원은 신분을 드러낼 수 없다. 작년 '왕재산 사건' 재판정에선 해외 요원 '블랙'들이 증언할 때 불투명 유리를 쳐 가렸다. 노무현 정부 때는 청와대가 국정원 간부 단체 사진을 인터넷 매체에 줘 공개하는 일도 있었다.

▶그제 국정원 댓글 사건 국정조사특위에 증인으로 나온 국정원 직원들 앞에도 흰 천이 드리웠다. 여야는 가림막을 치느니 마느니 두 시간을 맞섰다. 결국 어깨쯤까지 보이도록 아랫부분 30㎝를 잘라내고서야 청문회가 시작됐다. 이름과 얼굴을 숨기고 안보 일선에서 뛰어야 할 요원들이 선거 개입 논란에 휩싸여 불려나온 것부터가 국정원으로선 일대 망신이다. 여야도 정치 싸움 복판에 정보 요원들을 끌어들여 무엇을 얻었는지 돌아볼 일이다. 국정원 직원이 깡총해진 가림막 아래로 자꾸 드러나는 얼굴을 부채로 가리는 모습을 보며 쓴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