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희원·대중문화부 기자

131만 6928명. 지난달 17일 개봉한 영화 ‘미스터 고’(감독 김용화)가 이달 8일까지 모은 관객 수입니다. 제작비 220억원이 투입된 영화가 23일 동안 불러모은 관객 수 치고는 초라한 성적입니다. 막대한 마케팅까지 더해 올 여름 최고의 흥행대작으로 기대를 모은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미스터 고’를 실패작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영화담당인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미스터 고’는 관객 수와 별개로 작품의 질(質)이 세계 수준에 도달한 보기드문 한국 영화입니다. 충무로에서는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풀(Full) 3D 영화’를 김용화 감독이 순수 우리 기술로 구현해냈습니다. 그 결과물도 제작비와 기술력을 생각하면 놀랍습니다.

김용화 감독은 직접 사재를 털어 3D 전문스튜디오 ‘덱스터 필름’을 세웠고 이 회사의 160여명의 직원들은 120여억원의 예산으로 1년 6개월이 넘도록 공들여 ‘미스터 고’의 VFX효과를 극대화했습니다. 영화 안에서 주인공인 고릴라 ‘링링’과 ‘레이팅’이 등장하는 1000개의 샷을 스테레오 타입으로 표현하고 국내 자체 기술로 동물의 털을 구현하는 디지털 퍼(fur) 제작프로그램인 질로스를 만들었습니다. 김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리우드 기술자들이 '미스터 고'를 보고 놀라서 혀를 내두르더군요. 털의 품질에 놀라고, 자신들이 쓰는 예산의 10분의 1로 이 정도의 표현을 해냈다는데 놀랐습니다. '미스터고'는 털의 질감과 라이팅 수준, 그리고 입체 수준에서 세계 최고라고 자신합니다. 덱스터 필름은 현재 중국의 유명 감독과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로 했고, 미국과도 계약이 진행 중이예요. 한국의 VFX 기술이 점점 세계로 뻗어 나갈 겁니다. 두고 보세요.”

◇할리우드 뺨치는 세계 수준의 3D 기술력, 중국·태국 등에서 성공

두번째는 해외에서 호평받고 상업적으로도 잘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스터 고’는 중국에서 ‘大明星’이란 이름으로 개봉했는데 12일만에 270만 관객을 모아 1억위안(약 182억원)을 벌었습니다.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영화 시장인 중국에 진출해 역대 한국 영화 사상 최대 흥행 성공을 한 것입니다.

김 감독은 "세계 영화의 각축장으로 불리는 중국에서 뜻깊은 성과를 내 기쁘다"고 했습니다. ‘미스터 고’는 태국 등에서도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올라 있습니다.

마지막 이유가 가장 중요한 데요, 주변 대다수가 뜯어말린 ‘미스터 고’를 제작하느라 4년에 걸쳐 땀과 열정, 돈을 투입한 김 감독 스스로가 만족과 행복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입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영화가 자기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스터 고'의 최종 스코어가 어떻게 나오든 그건 이 영화의 타고난 수명으로 여길 것입니다. 모든 관객은 재밌는 영화를 보고 싶어합니다. 나는 영화를 만듦에 있어 ‘재미’를 제1의 가치로 추구해요. 다만 그 재미의 ‘질’이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만듭니다."

이런 김용화(42) 감독은 지금까지 데뷔작인 ‘오 브라더스’(2003년·400만명 관객)부터 ‘미녀는 괴로워’(2006년·662만명) ‘국가대표’(2010년·848만명) 등 딱 세편의 상업영화를 연출, 세편을 모두 성공시켜 18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모은 영화계의 ‘대박 대왕(大王)’입니다.

영화 흥행에 관한 한 실패를 모르고 한국 관객의 정서를 건드리는 밀도높은 드라마로 매 작품마다 진한 감동을 자아냈던 그가 왜 서커스단에 있던 고릴라 ‘링링’이 야구선수(팀은 두산베어스)가 된다는 황당한 판타시성(性) 영화에 뛰어들었을까요?

김용화 감독.

김 감독은 이 영화의 원작인 허영만 화백의 만화 '제7구단'을 영화로 만들어보자는 친구의 제안을 두 번 거절했는데 다시 3번째 제안을 듣고, 심사숙고 끝에 마음을 돌렸다고 합니다. 그는 “연이은 영화의 성공으로 평생 만져보지 못할 큰 돈을 손에 쥐었지만 늘 ‘새로운 도전'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어느 순간 내가 만드는 영화가 재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껏 해온 방식으로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어 나갈 수도 있지만, 한 번쯤 내가 가진 것을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시밭길이라 힘들겠지만, 힘 좋을 때 도전해보자고 마음먹었지요.“

김 감독은 ”진입 장벽이 있는 스토리라고 판단했지만 한번 터지면 크게 터질 것이라는 기대도 있어서 기술적인 부분에서 엄청난 완성도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2D 영화로 출발했지만, 기획 단계에서 ‘3D’로 가야한다'고 결심했다“고 말했습니다.

영화 ‘미스터 고’에 나오는 고릴라도 물론 100% 컴퓨터그래픽(CG)의 산물입니다.

“사실 영화 ‘국가대표’가 끝나고 너무 허무했어요. 만드는 영화들이 다 잘 됐으니까요. ‘국가대표’나 ‘미녀는 괴로워’는 둘 다 애국심과 성형수술이라는 팬덤에 기댄 영화예요. 막상 작품들이 잘되고 인센티브도 받고 또 여기저기서 상도 받고 다녔는데 허무했어요. 이럴려고 내 인생을 다이내믹하게 밀어 넣고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나 싶더라구요. 한 번은 '국가대표' 때문에 일본에서 열린 영화제에 하정우와 함께 참석했는데 이 관객들이 웃거나 울지를 않는 거에요. 그때 깨달았죠. 내 영화는 한국적 로컬 정서에 젖어 있구나."

◇“한국에 없는 영화, 세계 어디나 통할 보편적 영화 만들고 싶다”

'미녀는 괴로워'와 '국가대표'의 예상치 못한 해외 반응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작품 활동에 전환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학창 시절 좋아했던 영화들이 '백투더퓨처'나 '인디아나 존스' 같은 작품이었어요. 감독이 되려고 했던 것도 그런 작품을 보며 즐거웠던 기억 때문인데. 나는 지금 사람들을 어떤 감정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지금 힘을 가졌을 때 혁신적인 기술로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세계 시장의 문을 두드려 보기로 결심했지요. 단 소재의 기대치를 충분히 주고 싶었고 그래서 고릴라에 마음이 끌렸어요.”

이런 오기와 결단에다가 김용화 감독 특유의 인생 역정이 큰 동력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김 감독은 중앙대(영화학과) 재학시절 양친(兩親)을 여의고 생업 전선에 직접 뛰어들어 5년 동안 생선 등을 팔며 생계를 이었습니다. 그는 생선 장사 뿐만아니라 막노동에 장돌뱅이 생활을 한 적도 있는데, 그렇게 6년의 외도 끝에 그는 28살에 복학을 했습니다. 여담이지만 그는 “당시 하루에 고등어 1000마리의 배를 가르고 나면 허리를 펼수가 없었다. 지금도 고등어 한 마리의 아가미를 떼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빼는데 5초밖에 안 걸린다”고 말합니다.

“학비가 없어 생선 장사를 5년인가 했어요. 그때 인생 공부와 영화 공부를 가장 많이 하지 않았나 싶어요. 낮엔 생선장사하고 밤엔 비디오를 빌려 보면서 혼자 엄청난 양의 영화를 봤죠. 생선 장사라는 게 앞으로 남아도 뒤로 밑지는데, 하루에 30만원 어치를 팔아도 생선이 남으면 그 돈이 다 까이는 거예요. 그때는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재미있기도 했어요. 사기꾼이란 사기꾼은 다 만났고 정말 거칠고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났어요.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세상에 대한 이해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생겼어요. 쓸모 없는 고통은 없어요. 고통은 성장을 준다고 믿습니다.”

김 감독은 ‘미스터 고’가 기획 단계부터 ‘야구’ 영화인데다가 ‘동물’이 나오고 ‘스타 배우’는 없는 삼중고(三重苦)에 직면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고릴라를 얘기한 게 아니라 인간의 한계와 편협함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김 감독은 ‘미스터 고’를 통해 영화 인생의 새로운 단계로 도전과 비상(飛翔)을 시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김 감독의 도전은 이제 막 시작됐습니다. 그는 ‘덱스터 디지털’을 아시아의 유니버셜 스튜디오처럼 키우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습니다.

“‘미스터 고’ 한편 뿐만 아니라 앞으로 계속해 3D 영화를 제작할 것입니다. 국내외 영화들을 대상으로 시장 질서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가급적 큰 규모의 영화 위주로 제작하면서 ‘덱스터 디지털’을 키워나갈 것입니다."

김 감독은 ”지난 10여 년을 돌아봤을 때 지금이 가장 위험하면서도 행복한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는 갈림길에 서 있지만, 한국 영화의 기술적 발전에 계속해서 이바지하면서 관객의 평가도 달게 받았다”고 말합니다.

“저는 한국에 없는 영화를 만들려고 합니다. 늘 부담은 되지만 부끄럽지 않고 후회하지 않고 진심으로 영화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려구요.”

고교 진학 전까지 태권도 선수로서 소년체전에 출전해 은메달을 땄고 지금도 쉬는 날이면 야구장을 찾는 스포츠광(狂)인 그는 대학시절 밴드를 하고 공연기획자를 꿈꾸는 등 다채로운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는 영화 제작의 ‘비밀 병기’도 따로 갖고 있습니다.

바로 ‘비밀 공책(노트북)’인데요, 이 공책에는 평소 영화를 보고서 나중에 자신의 작품에 활용을 할만한 부분과 특이점 등을 일일이 다 꼼꼼히 정리해 두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그의 영화를 보면서 “어, 저거 어디선가 본 듯한 작품인데?”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김 감독은 소년시절 '수퍼마켓 주인으로 살면 행복하겠다'는 평범한 꿈을 갖고 있었는데 한 잡지책에 나온 ‘대부(代父·The Godfather)’를 만든 미국 영화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사진을 보며 '영화 감독'이라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나 한국 영화계의 ‘대표 선수’가 된 김용화 감독이 한국은 물론 세계 영화계에 길이남고 대박을 터뜨릴 날이 머지않아 오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