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 거주하는 '코피노(한국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1만~1만5000여명으로 추산된다. 대다수 한국 아버지는 아이의 존재를 모르거나 부정한다. '없는 사람' 취급받는 아이들의 삶은 열악하다. 오물이 고인 판잣집에서 맨발로 생활하며, 태반은 교육받지 못한다. 갓난아이들은 분유 대신 설탕물을 먹기도 한다.
목진혁(48) 동방사회복지회 이사는 이 아이들의 '키다리 아저씨'다. 지난 5월 동방사회복지회는 필리핀 수도 마닐라 인근 앙헬레스 지역에 코피노 아동복지 시설 '앙헬레스 이스턴 칠드런 센터(Angeles Eastern Children Center)'를 개소했다. 2007년부터 앙헬레스에서 코피노 지원 활동을 벌여 오던 목씨가 센터 살림을 맡았다. 국내 사회복지단체가 현지에 코피노 지원 시설을 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목씨는 앙헬레스에서 건축설계사무소를 운영하는 교민 사업가다. 1995년 필리핀에 이민한 후 무역업, 교민신문 기자 등 여러 일을 했다. 2006년 그는 취재를 하다 빈민촌에서 코피노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게 됐다고 한다. "장난치고 노는 모습을 보면 '한국 아이구나' 알 수 있어요. 눈에 띄게 영리하거든요."
코피노 대부분은 필리핀 편모 밑에서 최저 생활수준으로 살아간다. 목씨는 "경제적 어려움에 혼혈아라는 사회적 냉대까지 받는다"고 안타까워했다. "창도라는 한국 이름의 열세 살 소년은 필리핀 의붓아버지의 학대를 받으며 살고 있었어요. 창도를 보며 내가 뭔가 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이 평범한 사업가는 2007년 앙헬레스에 복지시설을 설립한다. 코피노 가정을 일일이 방문해 생활비와 교육비를 제공하고, 코피노 엄마들이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주선했다. '잔소리'도 많이 했다. "공부시키지 않으면 아이도 당신처럼 살게 될 텐데 그래도 좋은가?" 한국인에 대한 신뢰가 없는 코피노 엄마들도 그의 꾸준한 지원과 조언에 마음의 문을 열었다.
필리핀에는 코피노 외에도 미국, 영국, 일본 등 외국인 혼혈 아동이 있다. 이 나라들의 사회복지단체는 자국 아이들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어머니에게 직업교육도 한다. 목씨는 "무엇보다 아버지의 태도에서 차이가 난다"고 했다. "미국·일본 남자들은 자기 아이의 존재를 안 이상, 양육비를 보내거나 자국으로 데려가는 경우가 절반은 됩니다."
목씨의 지원 활동 소식을 접한 동방사회복지회는 체계적인 코피노 지원을 위해 2012년 필리핀에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복지회의 전문적인 프로그램을 도입해 코피노들이 현지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울 계획이다. 현재 30여명인 지원 아동 수도 늘려나갈 예정이다.
"스무 살이 된 창도는 올해 필리핀 명문 앙헬레스 의대에 들어갔습니다. 영리하고 활달한 한국 아이들은 조금만 도와줘도 훨씬 나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라나 한국과 필리핀을 잇는 가교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