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옥씨는 올해 상반기 ‘국민 드라마’로 인기를 끈 KBS 주말극 와 MBC 일일극 를 통해 다시 한번 존재감을 각인시킨 배우다. 그녀는 비슷한 시기에 방영된 이 두 드라마에서 상반된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에서는 우아하지만 유치하고 철없는 회장 부인 차지선 역으로 극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에서는 넉넉지 않지만 밝고 따뜻한 품성의 주부 고성실 역을 열연해 막장 분위기를 상쇄시켰다.

두 작품을 연달아 끝내고 새 드라마 촬영에 돌입하기 직전 김씨를 만났다. 인터뷰 장소는 서울 상도동 주택가에 위치한 불교 선원이었다. 독실한 불자인 김씨는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찾는 곳인데, 이곳에 오면 말씀 공부도 하고 심신이 안정돼 좋다”고 말했다.

학창 시절 부모님의 이혼과 그 후유증으로  공부에 흥미가 없던 김씨의 유일한 취미는 만화 삼매경과 그림 그리기였다. 가정 형편상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던 그녀는 고교 졸업 후 출판사 일러스트레이터로 취직했다. 이곳에서 2년 동안 교과서에 들어갈 컷을 그렸다.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홍익대 미대 시험을 쳤다가 낙방한 후, 2차로 지원한 곳이 서울예전(현 서울예대) 미술과였다. 실기고사 겸 면접시험을 치르던 날 그녀의 운명은 바뀌었다.

“미술과 면접을 보던 날 교수님이 느닷없이 저한테 그래요. ‘자네는 미술과보다는 연극과에 가는 게 좋겠어. 그림에는 소질이 없어’라고요. 생각지도 않은 권유에 놀랐지만 교수님이 시키는 대로 연극과로 갔어요.”

연극과에서 김씨는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 ‘연극’에 문외한이었던 그녀를 배우로 조련시켜 준 남편이었다. 그녀는 “남편 덕분에 생경한 분위기의 연극과에 적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대학 2학년 때 결혼, 17년을 부부로 살다 이혼했다.

김혜옥씨는 1980년 MBC 방송에 특채되면서 드라마에 데뷔했다. 등의 연극에서 주인공으로 열연하는 그녀를 드라마 감독이 스카우트한 것이다. 그녀는 연극 무대가 좋았지만 당시 살림이 어려웠던 친정을 돕기 위해 방송 일을 하게 됐다.

방송가는 연극판과 달리 경쟁이 치열해 텃세가 있었다. 연극무대에서 스타 대접을 받았지만 방송가에서는 ‘초짜’ 취급을 받았다. 에서 범인으로 나오는 등 단역을 전전하다 고정배역으로 맡은 것이 의 ‘서울댁’이었다.

“20년 동안 빨래만 했어요. 이미지 쇄신을 위해 중도에 하차하고 싶어도 그게 친정집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라 그만둘 수가 없었어요. ”

이상하게도 그녀가 출연하는 작품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서서히 주연급에서 밀려났다. 나중에는 섭외 자체가 뜸해졌다. 이런 그녀를 두고 에 함께 출연 중이던 김혜자씨가 “너 같은 배우를 감독들이 왜 쓰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격려해 주곤 했다.

이혼한 남편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김씨는 모든 활동을 접고 세상과 단절하고 지냈다. ‘저 사람은 나를 돌봐줬는데, 이혼하지 않고 내가 저 사람을 돌봐주었더라면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라는 자책감에 스스로를 마음의 감옥에 유폐시켰다.

김씨가 방송에 복귀한 것이 40대 중반. 2004년 방영된 KBS 시트콤 에 김영옥·한영숙씨와 함께 할머니 3총사 중 막내할머니로 캐스팅된 것. 김씨가 맡은 역할은 여고시절 이후 정신연령이 멈춰 할머니이기를 거부하는 만년 사춘기 소녀 같은 캐릭터였다. 그녀의 연기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할머니가 정말 깜찍하고 귀엽다”는 평이 쏟아졌다.

인기가 오르면서 드라마 출연 섭외가 줄을 이었다. 이때부터 ‘철없는 엄마’나 ‘푼수 마담’ 혹은 ‘재벌가 사모님’ 등 개성이 강하면서 코믹한 역할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런가 하면 등의 영화를 통해 엄마지만 자아가 강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씨는 “ 이후 신기할 정도로 많은 일이 들어왔다”며 “이건 내 힘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먼저 가신 분들이 집안 식구들 잘 다독거리며 살라고 힘을 주시는 것 같아요. 집안에서 내가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밀어 주시는 거죠. 아버지는 작년에 돌아가셨고, 엄마는 30년째 당뇨로 고생하고 계세요. 저는 여전히 몸이 불편한 친정엄마를 돌보고 있지만 힘들지 않아요. 그것도 다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씨는 최근 와 외에 SBS 미니시리즈 에도 출연했다.  김씨는 드라마 외에 불교방송의 생방송 토크쇼 ‘김혜옥의 아름다운 초대’를 벌써 8년째 진행하고 있다.

김씨는 오는 8월부터 방영하는 MBC 새 수목드라마 에 출연한다. 의 소현경 작가가 집필한 이 작품은 살인 누명을 쓴 한 남자가 백혈병에 걸린 어린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주요 줄거리다. 그녀는 이 드라마에서 야누스적 삶을 사는 여성 국회의원 역을 맡았다. 는 소현경 작가가 오래 전부터 준비해 온 작품으로 원래 김혜옥씨가 맡은 역할은 남성이었다. 그런데 를 하면서 소현경 작가가 김씨를 염두에 두고 배역을 여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에 출연하면서 남녀 팬이 많이 생겼어요. 글쎄 50이 넘은 저보고 ‘귀엽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아요. 사실 제 성격은 의 고성실에 더 가까워요. 소탈하고 내성적인 편이죠. 그런데 어떤 팬들은 고성실보다 차지선이 더 잘 어울린다며 청승 떠는 역할은 하지 말래요. 팬들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간섭해 주니까 저는 너무 좋아요. 그리고 제 안에는 고성실의 소박함과 차지선의 화려함은 물론 영화 에서 맡았던 매자처럼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열정도 있답니다. 그래서 저는 연기가 좋아요. 내 안의 여러 얼굴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으니까요.”

활짝 웃는 그녀에게서 ‘여인의 향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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