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4일 오후 7시,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 건물 앞에서 열린 한 보수단체의 집회현장에 위대용 인턴기자(가운데)가 출동했다. photo 백이현 영상미디어 인턴기자

"손님 모시러 갑시다." 지난 6월 25일 화요일 오후 8시30분. 서울지방경찰청 기동대와 함께한 사흘간의 광화문 경계근무의 마지막 출동을 알리는 명령이 내려졌다. 반쯤 정신을 놓고 있던 와중에도 출동 명령 소리를 듣자마자 몸이 벌떡 일으켜졌다. 아니, 일으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찰버스에서 1시간 반 동안 대기한 탓에 온몸이 굳고, 머릿속이 울렸다. 버스에서의 1시간30분은 휴식이 아니라 침식에 가까웠다. 서서히 몸을 일으켜 오늘 하루 함께 근무를 한 21기동대대 경찰 직원들과 버스 밖으로 나섰다.

서울 종로는 대한민국에서 집회와 시위가 가장 자주 열리는 곳이라고 같이 있는 경찰들은 말했다. 광화문광장, 청계광장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크고 작은 집회가 열린다. 집회를 관리하는 경찰들도 이곳에서 상주하다시피 한다. 집회나 시위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던 내가 광화문에서 3일간 직접 경찰이 되어 경계근무를 섰다.

3일 중 하루는 의경중대와 함께, 이틀은 직원중대와 함께했다. 의경중대는 군대와 같은 개념이고 직원중대는 경찰 공무원이다. "2008년을 전후로 의경들의 안전문제가 불거졌고, 집회현장에서 일어나는 상황 대처 능력은 직원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37의경중대장 변재원 경감은 설명했다.

◇POLICE 글자 노란색과 하얀색 차이는...

6월 23일 오전 9시,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앞에 있는 종로서로 출근했다. 일요일이라서 다른 직원들은 보이지 않고 한진섭 경사와 윤진석 경사만 나와 있었다. 내가 입어야 하는 경찰복은 휴가 중인 김지훈 의경중대원의 옷이었다. 상의는 맞는데 하의는 허리가 맞지 않았다. 급히 한 경사가 자신의 하의를 빌려줬다. 경찰단화도 빌려 신었다. 모자는 한 경사 것을 썼다. 근무모에 적힌 'POLICE' 글자 색이 직원은 노란색, 의경대원은 하얀색으로 다르다. 덕분에 하루 종일 의경중대원들에게 경례를 받느라 민망했다. 매번 취재 나온 기자라고 설명할 수도 없었다.

첫 근무는 광화문 광장 옆에 있는 미국대사관을 지키는 주요시설 관리 근무였다. 집회나 시위가 열려도 시설만 지키면 된다. 종로에 있는 주요 시설은 청와대, 미국대사관, 중국대사관, 일본대사관 등이다. 근무는 매일 서울시내의 기동대대가 돌아가며 한다. 이날은 서울 문정동에 있는 37의경중대가 미국대사관을 맡았다.

변재원 경감의 도움으로 2소대 대원들과 함께 근무에 투입됐다. 1시간 근무, 2시간 휴식하는 3교대 근무를 했다. 미대사관에서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월담이나 촬영, 낙서를 막는 일이 주 업무다. 오전 10시부터 입영 15개월차로 접어든 이병선(22) 대원과 대사관 정문에서 함께 근무를 섰다. 바지 뒷주머니에 꽂힌 빨간색 통이 뭐냐고 묻자 그는 "휴대용 소화기"라고 했다. 허리춤에는 곤봉을 차고 있었다.

소화기를 분사하거나 곤봉을 사용한 적이 있냐고 묻자 "아직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전반적으로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어깨에 단 호루라기는 멀리에서 대사관 사진을 찍는 관광객이나 시민들을 막기 위해 쓰인다. 이씨와 근무를 서는 1시간 동안 5~6명이 사진을 찍다가 호루라기로 경고를 받았다.

구름이 걷히고 서서히 해가 솟으면서 그늘이 사라졌다. 이씨는 "여름에 근무 설 때 가장 힘든 게 날씨예요. 너무 더우니까"라고 했다. 그나마 팔토시, 생수, 음료가 보급되기 때문에 버틴다. 겨울보다는 여름이 그래도 낫다고 한다. 의경중대에는 요즘 대세 패션과 치장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그루밍족'이 없었다. 이씨는 물론 옆에 있던 전성욱 대원도 따로 피부관리는 하지 않는다. 그 흔한 선크림도 바르지 않는다고 했다. "피부 트러블 때문에 선크림을 잘 안 발라요. 팩 같은 것도 안 하고." 그래도 전씨는 알로에로션만큼은 챙겨 바른다.

대화 소재가 거의 떨어져 머쓱해질 때쯤 교대조가 도착했다. 교대 시간은 매시 45분. 교대를 하고 미국대사관 뒤편에 마련된 간이휴게실로 향했다. 대략 33㎡(10평) 남짓한 공간에 소파 8개와 에어컨, 냉장고, TV 그리고 10명 정도가 누울 수 있는 평상이 있다. 이런 휴게실이 총 6개다. 2소대 소속이라서 숫자 2가 써진 휴게실로 들어갔다. 10여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점심식사는 도시락, 저녁식사 때는...

절반은 잠을 자고 나머지는 TV를 봤다. 그 안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도시락은 반찬이 8가지이고 된장국이 같이 나왔다. 나도 평소에 제법 밥을 빨리 먹는다는 소리를 듣는데 절반쯤 먹었을까, 옆에 있던 대원이 도시락을 비웠다. 2소대 부소대장 홍영기 경사는 "별일이 없을 땐 지금처럼 천천히 먹어도 되지만 상황이 발생하면 10분 만에 식사를 마치고 대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후에는 두 번 더 근무를 섰다. 한 번은 미대사관 오른편, 한 번은 왼편에서 근무했다. 다행히 움직일 수 있는 '유동근무'였다. 10m 정도 되는 길을 계속 왔다갔다 했다. 한 번 왕복하는 데 시간을 재보니 2분20여초, 1시간 동안 대략 25회를 왔다갔다 했다.

저녁식사는 도시락 대신 인근 식당에서 매식을 했다. 오후 7시30분이 되자 교대를 위해 다른 중대가 버스를 타고 도착했다. 37중대 근무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다. 30분만 더 있으면 끝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무전이 울렸다.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이 국가정보원의 대통령선거 개입을 규탄하는 집회를 청계광장에서 열고 있으니 37중대도 복귀하지 말고 대기하라는 내용이었다.

청계광장에서 정부청사까지 겹겹이 인간장벽이 세워졌다. 나는 정부청사 앞으로 배치됐다. 시위대는 멀리 보이지도 않는데 그렇게 서서 1시간을 대기했다. 시위대가 뭘 하는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했다. 몇 명이 모였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그저 위에서 내려지는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오후 8시50분 광화문에서 철수하고 남대문으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37중대는 남대문으로 갔고 나는 종로서로 복귀했다. 다음 날 얘기를 들어보니 상황은 10시30분이 돼서야 끝났다고 한다.

이튿날 종로서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현장에 나갈 채비를 했다. 어제 신었던 경찰단화는 밑창이 헐어서 다른 단화를 빌려 신었다. 서 있기만 했는데 밑창에 구멍이 뚫리다니 구두가 오래된 건지 내가 험하게 신은 건지 모를 일이다. 이날 서울지방경찰청은 나를 위한 경찰복과 단화를 따로 준비해 줬다. 내 이름이 적힌 경찰복을 입으니 어깨가 무거워졌다.

마지막 날 함께 근무한 21기동대 1제대 직원들이 쉬는 동안 잠을 자고 있다.

◇의경중대 아닌 직원중대의 '광타'

광화문 타격대로 배치됐다. 평상시에는 광화문 주요 지점에서 경계근무를 하다가 상황이 터졌을 때 출동하는 부대다. 줄여서 '광타'라고도 부른다. 광타는 의경중대가 아니라 경찰 직원으로 구성된 직원중대다. 전날 한참 어린 의경 동생들을 만났다면 이날은 형, 삼촌, 아버지뻘 정도 되는 분들과 함께 생활했다.

광타도 매일 서울 각 지역의 기동대가 번갈아 근무를 하는데 내가 갔던 날에는 문정에서 온 33기동대 1제대가 맡았다. 나는 서울정부청사 후문에 배치됐는데 바로 앞에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노조원 10여명이 돗자리를 펴놓고 앉아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무에 걸어놓은 '일제고사 폐지'라고 적힌 현수막이 보였다. 시위라기보다 소모임에 가까웠다.

"이 정도면 여성이 절반이고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괜찮은 편이에요." 박진석(33) 경장의 말이다. "금속노조처럼 쇠파이프를 들거나 직접 개조한 총을 쏘는 단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까이 붙으면 조인트를 까거나 방패를 뺏어가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얼마나 얄미운지…." 이렇게 말하는 박 경장도 한 살, 네 살짜리 아이를 둔 아빠다. 요즘 통 아이들과 놀아주지 못해 속상하다고 했다. 새벽에 출근해 밤늦게 들어가기 일쑤라서 아이들 자는 모습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동대의 가장 큰 고충은 언제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점에 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해야 한다. 그 때문에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대답도 "글쎄요. 그때 가봐야 알 것 같은데요"였다. 이날도 원래 3교대 근무였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1시간 근무, 1시간 휴식하는 맞교대 근무를 했다. 3교대 근무를 하다가 1시간마다 나가 서있는데 허리, 무릎이 비명을 질렀다. 발바닥은 불이라도 났는지 화끈거렸다.

휴식시간에 멍하니 있는 기자에게 소남우 경위는 "눈이라도 붙여요. 지금 쉴 수 있을 때 무조건 쉬어야 해요.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거든요"라고 조언했다. 자리도 불편하고 땀 때문에 찝찝하기까지 한데 어떻게 자라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그 말을 듣고 5분도 안 돼 곯아떨어졌다. 근무 때문에 잠에서 깼더니 다른 직원들이 "버스에서 이렇게 잘 자는 걸 보니 적응이 끝난 것 같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근무는 오후 6시까지 이어졌다. 6시에는 이날도 예정돼 있는 한대련 집회 때문에 버스를 타고 청계광장으로 이동했다. 저녁식사는 항상 근무지 근처에서 해결해야 하는데 식당을 찾는 것도 일이다. 식비는 1인당 6000원인데 광화문에서 한 끼 6000원짜리 식사는 흔하지 않다. 소 경위는 회사가 근처인 나에게 어디 괜찮은 식당 없냐고 물었다. 마침 같이 있던 사진기자가 괜찮은 식당을 안다고 해서 그곳으로 향했다. 회사 앞에 있는 ㅍ식당인데 소 경위가 "여기도 벌써 가본 곳"이라고 말한다. 결국 근처 다른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먹었다.

◇기동대 직원들이 식사 후 꼭 양치질하는 이유

기동대 직원들은 식사 후에 꼭 양치질을 한다. 이날 미처 칫솔을 챙겨가지 못한 나를 위해 33기동대장 최창호 경정은 직원을 시켜 칫솔을 구해 오도록 했다. 양치질이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근무여건상 양치질을 쉽게 하지 못하는 상황인데도 모든 직원이 식사 후 양치질을 하는 이유는 뭘까. 소 경위는 "시민들을 대하는 게 우리의 일이기 때문에 입 냄새가 나면 안 되잖아요. 상황이 열악해도 양치질은 꼭 해야 해요"라고 말했다. 직원들은 용변이나 양치질을 주변 건물에 있는 화장실에서 해결한다. 3일 동안 내가 이용한 곳은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외교통상부, 일민미술관, 주변 빌딩 등 광화문에 있는 다양한 장소의 화장실을 이용했다.

오후 7시경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서 한대련 집회가 시작됐다. 시위대는 300여명 규모였다. 우리는 7시30분쯤부터 동아일보 앞에서 대기했다. 시위자들이 청계광장을 넘어 광화문으로 진출할 것에 대비했다. 지나가는 한 시민이 우리를 보고 "저 사람들(시위대) 선동·내란죄로 잡아가라"고 내뱉고 사라진다.

기동대에서 근무한 지 1년6개월에 접어든 김종민 순경은 "경찰이 시위자들을 진압하거나 체포하려고 출동하는 게 아니에요. 시위대가 신고한 장소에서 신고한 시간 동안 집회를 무사히 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거죠. 다만 시위대가 인도를 막거나 차도로 진출하면 다른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잖아요. 시위대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다른 시민들의 안전도 중요하니까 더 확대되지 않을 정도로 막는 거죠"라고 말했다.

한대련 집회는 오후 9시쯤 끝났고 우리는 9시20분경 해산했다. 어제보다 왜 일찍 끝났나 했더니 윤진석 경사가 "오늘 대학생들이 농촌봉사활동을 가서 인원이 적었다"고 했다.

지난 6월 24일 33기동대 1제대의 한 직원이 버스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귀에 쓰고 있는 건 헤드폰이 아니라 귀마개다. photo 위대용 인턴기자

마지막 날에는 이미 이틀을 경험해서인지 마음이 편했다. 전날과 똑같이 광타에 배속돼 서울정부청사로 보내졌다. 오늘은 성동구에 본부를 두고 있는 21기동대 1제대와 함께 근무를 섰다. 직원들 얘기를 들어보니 아침 7시30분에 광화문에 도착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집에서 5시에는 일어나야 한단다. 시위가 있는 날에는 밤 12시는 돼야 집에 들어가는데 그렇게 되면 잠을 4~5시간 밖에 못 잔다. 그래서 직원들은 버스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데 어설프게 자는 잠이 더 괴롭다.

근무가 없는 시간에 나는 주로 잠을 잤다. 한 것도 없는데 버스에만 타면 잠이 쏟아졌다. 한참을 정신을 잃고 자다가 가까스로 눈을 떴는데 옆자리의 정호(42) 경위가 책을 펴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승진시험 공부였다. 강남 수서에서 교통순경으로 일하다가 올해로 6년 반째 기동대 근무를 하고 있는 정호 경위는 “버스에서는 불편해서 잠을 잘 못잔다. 그래서 공부를 한다”고 했다. 정 경위의 건너편에 앉은 유춘봉 순경도 근무시간 외에는 책을 펴고 공부를 했다. 그동안 정리한 노트가 새까맸다.

◇방패를 둘이 붙잡고 매달리는 이유는...

"방패 들어볼래요?" 21기동대대 1제대 팀장 강병의 경위가 내게 물었다. TV에서 흔히 보던 경찰 방패였다. 이왕 체험하러 온 거 방패는 들어봐야 하지 않겠나 싶어 "들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게다가 길이 1m, 너비 50㎝ 정도 돼 보이는 플라스틱 방패는 겉보기에 별로 무거워 보이지 않았다. 속으로는 '저거 들면 폼 좀 나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패를 들기 위해 검정색 반장갑을 빌려 양손에 꼈다. 방패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무겁다.

처음 들었을 때는 3㎏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들고 현장으로 출동하면서 '5㎏이 아닐까' 생각했다. 강 경위는 방패를 들었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빼앗기지 않는 것' '시위대가 방패 밑을 들어 올려 경찰이 방패로 찍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알려줬다. 그러기 위해선 왼다리는 구부리고 오른다리는 쭉 펴서 무게중심을 잡고 방패를 왼쪽 어깨에 한껏 붙여야 한다. 설명 들은 대로 자세를 취했는데 다른 직원이 내 방패를 잡고 흔드니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래서 실제 현장에선 한 사람이 더 방패에 달라붙는다고 한다.

우리는 서울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열리는 집회현장에 투입됐다. 일단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대기했다. 청계광장의 한대련과 동화면세점 앞의 철도노조가 합류할 때 발생할지 모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언제나 '만일의 사태'가 문제다. 강 경위는 "오늘은 집회 규모가 작아서 별일 없이 마무리될 것 같다"고 말했다.

강 경위는 기동대 근무만 15년을 한 베테랑이다. 2006년 평택 대추리 시위와 포항 건설노조 시위, 2008년 촛불집회 등 굵직한 집회는 모두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세 번이나 죽창에 찔리기도 했다. 눈 옆을 찔려서 실명할 뻔한 적도 있다. 작년에는 대학생 집회현장에서 우르르 달려오는 학생들에게 밀려 인도에 설치된 버팀목에 허리를 다쳐서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수술비는 자가 보험으로 처리했다. 집회현장에서 입은 상해지만 치료비 청구절차가 복잡해 포기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경찰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서 수술비의 절반만 보험 처리하면 됐다. 강 경위는 이렇게 힘든 일을 어떻게 15년이나 해 온 것일까? "매일 불확실한 상황 때문에 긴장하고, 편하게 친구들과 약속도 못하고, 일주일에 두 번은 집에 못 들어가지만 적성에 맞으니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매일같이 직원들과 부대끼며 생활하고 동료애를 느끼고. 이젠 서로 가족이나 마찬가지죠." 강 경위가 이해하냐고 묻는 듯 눈빛을 보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