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석 정치부 국방팀 기자

육군 11사단 충무대대의 박모(20) 이병은 부대에 전입 온 지 한 달 남짓 됐지만, 일과 이후 생활관(내무반)에서 누워서 쉽니다. TV시청을 할 때면 리모컨을 손에 쥐고 원하는 채널과 프로그램을 골라 봅니다. 컴퓨터활용 1급 자격증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생활관에서 “이병이 미쳤냐?”고 혼내는 병장 또는 상병은 없습니다. 박 이병의 생활관은 비슷한 시기에 입대한 이병들이 지내는 동기 단위 생활관이기 때문입니다.

군(軍)은 2년여 간의 시험 기간을 거쳐 작년 7월부터 ‘동기(同期) 생활관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동기 생활관’은 일과(日課) 시간에는 기존 분대 단위로 훈련과 업무를 수행하고 일과 후 취침과 휴식 시간에는 중대(또는 대대) 내 동기나 비슷한 기수끼리 생활관을 쓰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이로 인해 1948년 건군(建軍) 이후 같은 분대에 속한 병장부터 이병까지 점호와 집합, 교육·훈련, 식사, 작업, 취침 등을 함께 하며 24시간을 같이 지내던 병영 생활에 대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출·퇴근’ 개념이 생긴 것이지요.

육군 11사단 충무대대 소속 병장들이 동기 단위 생활관(내무반)에서 청소를 하고 있다. 동기 내무반은 동기나 비슷한 기수끼리 내무반을 써야 하기 때문에 병장들도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내무반 청소를 해야 한다.

지난해 7월부터 군에 확산되고 있는 ‘동기 생활관’

군이 ‘동기 생활관’을 시행하게 된 목적은 “일·이병의 병영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국방부 관계자는 “일·이병은 상병·병장과 위계질서에서 오는 긴장감 등으로 생활관(생활관)에서 편안한 휴식이 제한된다”면서 “작전 임무나 교육훈련보다 생활관에서 선임병에 의한 간섭과 통제로 인한 심리적 고통이 더 힘든 병영생활을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국방부에 따르면, 분대 단위 생활관 문화는 일제 시대 때 생겨난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광복 이후에도 우리 군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국방 재정이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서 소대 단위(30~50명)로 침상형 구조의 생활관에서 생활해야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 있습니다. 현재 전세계에서 분대 단위 생활관을 쓰는 군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군은 ‘병영 생활관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소대 단위 침상형 생활관을 분대 단위(8명) 침대형 구조로 바꾸고 이와 함께 ‘동기 단위 생활관 제도’를 시작했습니다.

현재 부대 임무 및 시설여건에 따라 장성급 지휘관이 판단해 ‘동기 생활관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 올 4월 현재 육군의 48%, 공군 100%가 이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해군과 해병대는 14개 부대에서 시험 적용중입니다.

육군 11사단의 경우, 예하부대인 충무대대가 작년 2~7월까지 시범 운영을 한 다음 최근 사단 전체가 전면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이곳에선 이병이 일과 후에 공부하고, 병장이 빗자루 들고 청소하고 쓰레기통 비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겨울에 눈이 오면 예전 같으면 생활관 한 쪽 구석에 은폐(隱蔽)·엄폐(掩蔽)해 있었을 병장들도 삽질을 하고 눈을 퍼 나른다고 합니다.

육군 11사단 충무대대 소속 이병들이 동기 단위 생활관(내무반)에서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다. 11사단 측은 동기 내무반 도입 이후 인터넷으로 원격 강좌를 신청한 병사수는 2011년 45명에서 작년 193명으로 늘었고, 같은 기간 검정고시 응시자수는 38명에서 84명으로 배 이상 증가했다고 밝혔다.

병장들도 “동기 생활관 생활이 훨씬 속 편하다”며 환영

그렇다면, 동기 생활관은 ‘이병은 천국, 병장은 지옥’일까요?

부대에서 만난 대부분의 상병과 병장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몸은 조금 피곤해졌지만, 마음은 편해졌다”는 겁니다. 전모(22) 상병은 이병에서 일병으로 막 진급했을 때 동기생활관에서 생활하게 됐습니다. 전 상병은 “처음에는 ‘병장 돼도 청소해야 하는’ 게 억울했지만 생활관에서 이병 돌봐주는 시간이 줄어 자유시간이 더 늘었다”고 말했습니다.

군은 ‘동기 생활관’ 도입 이후 여가 시간을 이용해 공부나 자격증을 따는 병사가 늘었다고 밝혔습니다. 11사단의 경우 인터넷으로 원격강좌를 신청한 병사 수는 2011년 45명에서 지난해 193명으로 늘었습니다. 같은 기간 검정고시 응시자수는 38명에서 84명으로, 국가기술자격검정 응시자수는 328명에서 440명이 됐습니다. 부대의 한 간부는 “과거에는 이병이 부대에 오면 적응을 못해 ‘관심 병사’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동기 생활관 실시 후 어떻게 하면 부대에서 자기 개발을 시킬까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부대 가혹행위와 사고가 급감했습니다. 충무대대의 한 간부는 “작년 부대 사고는 딱 한 건이었고 그것도 내무생활과 상관없는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국방부 조사에 따르면, 동기 생활관을 실시한 육군 670여개 대대의 자살 사망자 수는 2011년 18명에서 작년 3명으로 줄었습니다.

동기 생활관 실시를 앞두고 군 안팎에선 “훈련과 전투준비 태세에 지장을 줄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습니다. 선임병이 후임병에게 일대일 교육을 할 시간이 줄어 전투능력이 약해질 것이라는 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11사단의 경우 우려했던 전투력 저하는 없었습니다. 체력과 사격술이 우수한 병사를 뜻하는 ‘특급전사’는 2011년 1053명에서 작년 1640명으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부대 관계자는 “같은 생활관을 쓰는 동기들끼리 서로 경쟁하는 분위기가 생겨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충무대대는 이병들이 부대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전입 직후 닷새동안 신병 교육을 실시합니다. 또 막내 이병 생활관에는 일병 1명이 ‘상담병’으로 배치돼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멘토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육군 11사단 충무대대 소속 이병들이 일과후 여가 시간을 이용해 내무반에서 편한 자세로 TV시청을 하고 있다. 동기나 비슷한 기수끼리 내무반을 쓰는 동기내무반에서 이병들은 리모컨을 가지고 원하는 채널을 골라보며 웃고 떠들 수 있다.

전우애 및 전투준비 긴장감 약해지고 동기간 ‘왕따’ 우려는 단점

충무대대 정모(22) 이병은 같은 부대원 송모(21) 일병을 부를 때 “송 일병님” 대신 “OO야”하고 이름을 부릅니다. 둘은 입대 전 친구사이도 아니었고 입대일도 송 일병이 두 달 정도 빠르지만 서로 이름을 부르는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부대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2009년부터 11사단은 같은 달 입대는 물론 두 달 먼저 입대했거나 두 달 나중에 입대한 병사들까지 동기로 분류해 왔습니다. 부대 관계자는 “동기 범위를 넓게 정해놓은 게 생활관 배정과 분위기 조성 등 동기 생활관 제도 시행에 도움이 된 것 같다”고 했습니다.

‘동기 생활관’이 정착된 육군 3사단과 8사단 역시 입대일 기준으로 앞뒤 한 달 사이 간격으로 동기를 정해왔던 부대입니다. 군 관계자는 “동기 생활관이 확대될수록 생활관 배정 등을 위해 동기 개념이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며 “군 기강이 흐트러질까 우려된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생활관을 쓰는 동기들 사이에서 ‘왕따’가 생기거나 서열화 문제로 다투는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동기 생활관을 시행하고 있는 모 부대에선 ‘식판을 누가 닦느냐’를 두고 부대원들끼리 다툰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일과가 끝나면 분대원들이 ‘퇴근’해 각자 생활관에서 쉬다 보니 분대 또는 소대의 선·후임간 대화가 부족해진 점도 문제점으로 꼽힙니다. 공군 관계자는 “선임이 제대할 때 축하파티를 열어주는 장면도 사라지고 있다”며 “전우애가 부족해지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고 했습니다.

동기 생활관 제도가 전 부대로 확대되는 건 아닙니다. 비무장지대(DMZ) 내 철책선을 지키는 일반전방소초(GOP) 등 부대임무와 시설여건에 따라 기존 분대 단위 생활관 방식을 유지해야 하는 부대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형평성 논란도 일고 있습니다.

이 제도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 입장을 보이는 이는 예비역 군인들입니다. “군대는 보이스카웃 단체가 아니다”라며 “항상 전투준비에 최선을 다하고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할 병사들을 동기끼리 모아 놓으면 풀어져서 부대가 운영되겠냐”는 것입니다.

한 예비역 장성은 “비상시 기계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전투훈련을 더 강화하려면 병장부터 이병까지 한 생활관에서 생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국방부 관계자는 “동기 생활관에서 발생한 문제와 관련해 각종 대책을 마련 중”이라며 “기존 생활관보다 동기 생활관이 더 좋은 제도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충무부대의 한 간부도 “처음엔 동기 생활관을 반대했는데 막상 실시하고 보니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다”며 “무엇보다 병사들의 표정이 밝아졌다”고 했습니다.

부대에서 만난 한 일병에게 ‘옛날 생활관 제도로 돌아간다면 어떨 것 같냐’고 물었습니다. 일병은 “다시 입대하는 기분일 것 같습니다. 그런 날은 절대 오면 안되는데 말입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