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전선하 기자] 신예 배소은은 영화 ‘닥터’(김성홍 감독)에서 온갖 고생을 다한다. 서른 살 쯤 차이 나는 변태 남편에게 번번이 “천박하다”는 욕을 듣고, 엄마의 돈줄 역할을 하기 위해 그러한 관계를 끊지 못하다 급기야는 남편의 칼질에 얼굴이 난도질당하는 봉변을 겪는다. 두들겨 맞고 공포감에 질려 눈물을 떨어뜨리는 등 배소은이 극중에서 펼쳐야 할 액션과 감정은 다양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재학하며 학교 작품에만 출연해왔던 배소은이 상업 영화 첫 데뷔작으로 ‘닥터’를 택한 이유는 바로 그러한 점 때문이다. 노출에 강도 높은 베드신 등 쉽지 않은 관문도 거쳐야 했지만 그런 것 쯤은 쿨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왕 할 거 신인 여배우로 강렬한 눈도장을 찍고 싶었다는 게 배소은의 바람이다.
◆ 대선배 김창완? 첫 만남부터 '여보~'
"지금까지 네 번쯤 '닥터'를 봤어요. 지난해 부산영화제 때 처음, 가장 최근엔 VIP 시사회 인데, 볼수록 관객의 입장이 돼가는 것 같아요. 처음엔 제 얼굴이 스크린에 나오는 것 자체가 신기했는데 이제는 장단점이 뭔지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배소은은 ‘닥터’에서 데뷔 30년 이상의 베테랑들과 작업했다. 김성홍 감독을 비롯해 주연배우로 출연한 김창완까지, 신인 여배우의 기가 죽을 법도 했다. 하지만 배소은에겐 이른바 ‘깡’이 무기였고, 이 같은 모습이 다행히도 현장에서 받아들여졌다.
“감독님께서 욕을 참 잘 하셨어요(웃음). 첫 촬영 때 ‘XX년 똑바로 안 해!’ 라고 고함치시는데 저는 뭐 울어버렸죠. 촬영 마치고 감독님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이 ‘다음 촬영 때까지 네가 해야 할 일은 마음을 잡는 것, 그거만 해오면 돼’ 하셨어요. 심호흡 많이 하고 며칠 후 다음 촬영을 했는데 또 다시 같은 욕설을 들었죠. 그런데 순간 저도 모르게 ‘XX년 똑바로 할게요’ 하고 받아쳤어요. 다행히 감독님께서 제 그런 모습을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당당하고 되바라진 모습이 됐다고 여기신 거죠. 그때부터 조금 편하게 마음을 먹기 시작한 것 같아요.”
기죽지 않는 배소은의 당당함은 김성홍 감독 외에 김창완에게도 먹혔다. 사람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이미지에서 최근 악역을 도맡으며 좀처럼 파악이 잘 되지 않는 노회한 김창완이라는 대선배에게 배소은은 신인의 당돌함으로 어필했다.
“김창완 선배님은 격이 없는 분이세요. 첫 리딩 때 ‘절대 기죽지 말자’ 하는 마음으로 일부러 선배님께 ‘여보’라고 불렀어요. 자칫하다간 ‘얘 뭐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자기야’ 하고 받아쳐주시는 거예요. 극중에서 저희가 결코 사이좋은 부부사이가 아닌데도 촬영장에서 살갑게 지내는 모습에 감독님이 그러지 말라고 만류하실 정도였어요.”
◆ 나를 믿고 신념에 따른다
배소은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통해서다. 당시 그는 가슴과 배꼽만 아슬아슬하게 가린 골드빛 드레스를 착용하고 당당하게 시선을 즐기는 모습으로 단 번에 주목 받았다. 하지만 작품 보다는 노출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에 대해 당시 곱지 않은 시선이 생겼다. 이름을 알리는 대신 부정적 이미지 역시 함께 가져가야 했다. 영화에서는 또한 강도 높은 베드신에 노출신까지 있다. 신인 여배우로서는 낙인찍히기 십상인 위험한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그간 학생으로 지내다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일단 시작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첫 작품인데 노출이나 베드신으로 이미지가 굳어질 수 있다는 걱정의 시선도 당연히 많았죠. 그렇지만 제 생각에 사람이 하는 일인데 어떤 일이건 상처는 동반되는 것이고, 그런 이유로 시도조차하지 않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아요. 평소 성격이 남의 시선 보다는 나 자신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고, 또 상처 받았다고 절망하는 타입이 아니에요. 나 자신을 믿고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편이죠.”
노출이나 베드신에 대해서만 두려움 없는 도전을 하는 건 물론 아니다. 은막의 신비로운 여배우 보다 다양한 삶을 대신 살아보고자 하는 것에 배소은은 더 욕심이 난다.
“신인 배우로서 제가 가진 장점이 있다면 저는 다른 여배우들이 욕심낼 만한 것들을 버릴 각오가 돼 있는 걸 거예요. 예쁘게 보이는 것에 저는 크게 관심이 없거든요. 연쇄 살인마나, 반대로 그런 잔혹한 일을 당하는 피해자 등 하고 싶은 역할이 많아요. 그럴 때 예뻐 보이고 싶은 욕심 정도는 가볍게 내려놓을 준비가 돼 있어요.”
강철멘탈. 배소은을 인터뷰 하며 스치는 생각이다. 만 24세. 많지도 않은 나이에 이런 두둑한 배포는 과연 어디서 오는 걸까?
"'닥터' 시사회 때 엄마랑 친구들이 나란히 영화를 봤어요. 초반부터 정사신이 등장하는데 친구들이 엄마 눈치를 보느라 안절부절 못했죠. 그런데 저희 엄마 반응이 '너희는 연기를 하는데 왜 그런 시각으로 보니? 나는 내 딸이 아니라 극중 박순정으로 보이기만 한다. 니들 반응 촌스럽다' 하셨다는 거예요. 감사했죠, 엄마의 이런 반응. 평생을 그렇게 강하게 살아오신 분이세요. 제 롤모델이기도 하죠. 저요? 저는 엄마에 비하면 새발에 피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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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기자 rumi@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