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홍 감독의 '닥터'(20일 개봉)를 본 직후에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이 영화의 주연배우인 김창완(59)을 만났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지만 기자는 목에서 말이 걸려 목례만 했다. 영화의 잔상(殘像) 때문이었다. 이 영화에서 생애 첫 주연을 맡은 김창완은 여성 혐오와 열등감 그리고 광기에 사로잡혀 장모와 아내, 간호사 등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성형외과 의사를 연기했다. 방금 본 영화 속에서 여자를 죽인 뒤 쾌감을 느끼는 듯 슬며시 미소 짓거나 "미친 X"을 되뇌며 방안을 서성이던 그를 처음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긴 힘들었다. 극단적인 설정을 한 이 영화는 장르물이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야기의 개연성과 디테일이 떨어진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악역이다.

"장모님을 그렇게 하는 장면(※스포일러라 밝힐 수 없음)에서 시나리오를 집어던졌다. 너무 힘들어서. 그런데 누군가 공들여 썼을 시나리오를 몇분 만에 던져버린 데 대한 자책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왜 이렇게 이 영화를 불편해하는지도 알아보고 싶었다. 알고 보니 편견이 많았던 거다. 영화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편견 말이다."

―감독은 왜 이런 사이코패스 의사 역할을 당신에게 맡기려 했을까.

"이유는 모르지만 그건 굉장히 불쾌하다. 하필이면 왜 나인가(웃음). 아무래도 나한테 왕자병과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다. 이 영화 찍으면서 그런 거 다 내려놨다. 또 영화에 대한 순정을 다시 찾았다."

김창완은 기자의 실없는 농담에도 '허허' 하는 낮은 웃음소리로 자주 웃다가도 금세 찌푸린 얼굴로“주연은 앵벌이나 다름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첫 주연이다.

"주연배우가 이렇게 고생스러운 건지 몰랐다. 이런 일인 줄 알았다면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즐겁게 그릴 수 있다. 그런데 300만원 받을 수 있는 작품을 그려야 한다고 하면 그릴 수가 있겠나. 주연배우가 딱 그 심정이다."

―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업(業)으로 삼은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30년 가까이 했다.

"그게 하고 싶다고 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다들 해달라고 하니까 한 것이다. 재미는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하나?

"(목소리를 낮추고) 돈 때문에(웃음). 사실 돈보단 그동안 쭈욱 조연을 했기 때문에 계속할 수 있었다. 음악은 시작할 때부터 주인공이었으니까. 하지만 연기는 파티에 초대받는 심정으로 했다. 계속하다 보니 연기도 조금 늘긴 느는 것 같다."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역할이나 작품이 있나.

"있다. 로맨스. 어떤 것이든 아름다울 것 같다."

―연애도 해보고 결혼도 한 중년들이 왜 로맨스에 애착을 가질까.

"로맨스, 그러니까 로망이란 것은 청춘 같아서 다 지나고 나서야 '아 지나갔구나'라고밖에 알 수 없다. 로망은 지금 만난 뜨거운 사랑이 아니라 가버린 시간과 지나간 계절이다. 그러니 젊은이들은 로망을 모른다."

―많은 일을 힘들지 않게 잘해내는 것 같다. 비결이라도 있나.

"듣고보니 내가 진짜 짜증 나는 캐릭터 같다. 그러니까 영업 비밀을 밝히라는 건가? 난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엔 그저 잘 뿐이다."

―그래서 '소년' '청년'이란 수식어도 달고 사는 것 아닌가.

"술친구들이 꽤 있다.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고 시간 남으면 그들과 술 마신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이 울타리 밖에 나가서 다른 걸 하고 싶다. 그리고 이젠 철없이 사는 것도 창피하다. 환갑이 다 돼갖고 언제까지 아기처럼 살아야 하나. 물론 아기처럼 사는 게 창작에는 많이 도움이 된다. 그래서 나 몰라라 사는데 언제까지 외면하고 살 수 있을까 싶다. 어제 갑자기 물병에서 '아프리카 어린이를 도웁시다'란 문구를 발견하고서 다 읽어봤다. 300원이면 그렇게 많은 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데 그게 또 신경이 쓰이는 거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가.

"'불안한 행복'이란 노래 만들 때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안한 행복'은 1991년 나온 '산울림' 12집에 수록된 노래다. 이 노래를 들으면 김창완이 '사람 좋은 옆집 아저씨'가 아니라 예민하고 치열한 사람이란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어쩌면 그가 언뜻언뜻 내비치는 이런 서늘함 때문에 연출자들도 그에게 악역을 맡기는지 모른다. '불안한 행복'의 가사는 이렇다.

'예쁜 아내와 아담한 집과 새로 산 신발/창틀을 긁는 아침햇살 모르는 채 잠들어 있는 내 아이의 포근한 이불(중략)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떨어져 있는가를 알기 위하여/신문을 보아야 한다./앨범도 가끔 보아야 한다./나는 가난했었고/사진 속 내 눈동자는 불안해 보였지./어머니 아버지는 전란을 겪으셨고/ 나의 형은 젖이 모자라 죽었네./그렇게 불안하게 나는 나의 행복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