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10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에는 ‘부산 광안대교 개통 10년’ 기사가 실렸다. 2003년 6월 통행료를 받기 시작한 지 꼭 10년이 된 광안대교는 여러가지 흐믓한 형용어귀가 붙는다. 대표적 흑자(黑子) 다리, 부산의 대표적 성공사례, CNN선정 2012년 한국에서 가봐야할 아름다운 50선, 쇠락하던 광안리를 부흥시킨 다리 ···. 하루 통행량으로 보면 개통 당시 3만3000여대에서 지난해 9만여대로 증가했다. 예측통행량의 95%다. 2012년 광안대교의 통행료 수입은 417억원인데, 이중 유지관리비용·인건비 138억원을 제외한 279억원이 순수익이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두 가지가 궁금해졌다. 하나는 부산의 대표적 성공사례인 흑자 다리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흑자 다리는 수요예측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는 말이다. 거제도와 가덕도를 잇는 거가대교와 같은 경우 수요예측이 틀려 적자를 면치 못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왜 광안대교는 수요예측이 정확해 흑자다리가 되었고 거가대교는 그 반대가 되었을까.
다른 하나는 광안대교는 아름다운 미관과 함께 부산을 알리고 광안리를 부흥시킨 다리로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광안대교는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 청계천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만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광안대교는 부산에 있다는 지역적 한계로 인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측면이 있다. 기자 역시 광안대교를 여러번 보면서 감탄은 했지만 정작 이 다리가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고 누가 만들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부산광역시 김영식 교통국장은 10여년 전 광안대교가 건설중일 당시 교통기획 주무관 자리에 있었다. 그 역시 광안대교 건설에 간접적으로 참여한 사람이었다. 김영식 국장에게 광안대교 건설에 가장 공이 큰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영식 국장은 건설안전관리본부 본부장을 지낸 조창국씨(현 엘가드 대표)를 추천했다.
◇ 광안대교는 SOC사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요 예측이…
조창국씨는 1944년생으로 경남고를 거쳐 부산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건설부를 거쳐 1970년 부산시에 토목기술자로 들어갔다. 1996년 8월까지 광안대교 건설을 책임지는 건설안전관리본부장을 지낸 인물이다.
지난 6월11일 오후 광안대교가 그림처럼 보이는 광안리해변의 한 카페에서 조창국씨를 만났다. 그는 "촌사람에게 뭘 물어볼 게 있다고 서울서 내려오셨습니까"라고 말했다. 조씨는 누런 봉투에서 연필로 메모한 자료와 인쇄물을 꺼내놓고 인터뷰에 응했다. 광안대교의 역사는 1990년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 11월 당시 조씨는 부산시 건설본부 토목부장이었다.
- 광안대교가 다른 SOC교량과 달리 수요 예측이 정확했던 이유는 뭔가.
"거가대교의 경우 사회간접자본(SOC)으로 건설되었다. SOC 사업의 경우, 정치권의 실력자에 의해 정책적으로 결정된 이후에 거기에 교통영향평가와 수요예측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수요예측이 건설 요건에 안맞게 나오면 안되니까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 광안대교는 SOC사업이 아니었다."
- 최초에 광안대교 아이디어는 어떻게 나오게 되었나.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주택 2백만호 건설 공약을 추진하고 있었다. 2백만호 건설의 일환으로 부산시는 해운대 신시가지 건설기본설계를 완료했다. 그 일대에 있던 051탄약창을 다른 곳으로 이전시키고 아파트 3만4000세대를 짓는 신시가지 계획을 만들었다. 안상영 시장 시절이다. 아파트가 건설되어 상주 인구가 12만명이 될 것을 예상해 교통영향 평가를 했다. 그런데 진입로가 왕복 4차선 수영로밖에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해운대신시가지로 들어가는 진입로 개념에서 다리 건설을 생각했다."
- 그게 광안대교의 시작인가.
"아니다. 최초에는 남천동의 49호광장에서 동백섬 입구까지 연결하는 교량을 건설할 계획을 수립했다. 3000억원 예산으로 계획을 수립하고 실시설계를 하려고 하니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 무슨 문제가 발생했나.
"그때 수영만에는 약 50만평 규모의 수영군용비행장이 있었다. 이 군용비행장이 언젠가는 다른 곳으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해운대지구가 낙후되어 있었다. 군용비행장이 이전해 그 지역이 개발되면 또다시 교통량이 증가한다. 그리고 배후에 있는 기장군도 개발해야 했다."
이즈음 부산시장이 안상영 시장에서 김영환 시장으로 바뀐다. 김영환 시장이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는 신임 시장에게 별도 업무 보고를 했다. 조씨의 김시장에게 이렇게 보고했다고 한다.
“현재 수립한 교량은 해운대신시가지 진입도로로 충분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다리를 놓아야 할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 기왕 다리를 놓을 바에야 더 크게 건설할 필요가 있다. 시장님이 내 얘기를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게 하면 돈이 얼마나 드냐’고 묻길래 내가 6000억원이라고 했다.”
계획수립 책임자로서 그는 건설비용 6000억원 재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부산시는 총 건설비용의 4분의 1인 1500억원을 담당한다. 나머지는 국고 지원(해양수산부) 1500억원, 도로 사용료 수입 1500억원, 그리고 해운대개발에 따른 예상 수익금 중 절반인 1500억원. 조씨는 시비는 1년에 300억원씩 5년간 배정하면 1500억원이 된다고 생각했다.
김영환 시장은 광안대교 건설안을 승인했고, 조씨는 김영환 시장에게 광안대교 노선을 보고했다. 광안대교는 수영구 남천동 49호 광장에서 출발해 광안리해수욕장 앞바다를 가로질러 이어 해운대구 우동 부근을 잇는 길이 7.42km(우동 부근에 현재 센텀시티가 들어섰다). 김영환 시장은 1991년 7월2일 시청 내에 광안대교 추진단을 설치했다. 3명으로 구성된 추진단은 단장 조창국, 계장 송영범, 직원 김인수였다. 추진단은 곧바로 부산대학 조현영 교수·장병순 교수, 부경대학교 이동욱 교수·이종출 교수, 서울대학교 장승필 교수, 인제대학교 백성룡 교수, 한양대학교 장동일 교수, 정신엔지니어링 백정수 교수, 다산컨설턴트 황학주 교수로 자문교수진을 구성했다.
◇ 광안대교를 복층 다리로 만들게 된 이유는
부산시는 광안대교 설계 공모를 했다. 부산시는 교각 사이의 거리를 500m로 하고, 교량이 수평선에 방해를 주지 않고, 요트 통행에 지장이 없어야 한다는 3가지 전제조건을 내걸었다. 이 결과 4개 설계회사가 공모에 참여했다. 현수교 1개, 사장교 2개, 침매(沈埋)터널 1개였다. 심사위원회는 이틀동안 심사를 벌인 끝에 광안대교를 현수교로 짓기로 결정했다. 부산시는 현수교 설계안을 제출한 삼우기술단을 선정하면서 일본 조다이와 기술협약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 광안대교는 복층이다. 복층 다리는 보기 드문데 왜 복층으로 만들었나.
"2층 다리는 순수하게 내 아이디어다. 아시다시피 광안리 앞바다는 바람이 쎄다. 처음 삼우기술단이 가져온 설계안은 왕복 8차선 평면도로였다. 나는 광안대교를 사라호 태풍에도 견디는 다리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940년대 미국의 타코마 다리가 붕괴된 원인을 다시 살펴봤다. 타코마교는 초속 19m 바람에도 무너졌는데, 그 원인은 공명(空鳴)현상 때문이었다. 나는 예상되는 공명현상을 없애야만 사라호 같은 태풍이 다시 와도 다리가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복층다리는 위아래로 꽉 잡아주니까 공명현상을 없앨 수 있다고 판단했다."
- 우리나라도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닌데, 내진 설계가 되었나.
"당시는 교량설계에 내진설계 개념이 없을 때다. 용역 조사를 바탕으로 진도 9에도 견딜 수 있게 설계를 했다. 처음에는 교각을 뻘속에 박는 것으로 설계해 온 것을 암반 1.5m 깊이에 앉히는 것으로 변경했다."
1994년 9월, 부산시는 광안대교 건설사업소라는 직제를 승인했다. 건설사업소장에 조창국씨가 임명되었다. 본격적인 광안대교 건설이 시작된 것이다. 건설사업소는 같은 해 12월, 7.42km를 5개 공구로 나눠 시공업체를 선정했다. 1공구는 대림건설 등 3개 사, 2공구는 동아건설 외 3개사, 3공구 포스코건설 외 3개사, 4공구 롯데건설 외 3개사, 5공구 대우건설 외 3개사.
당시 삼환건설 현장사업소장으로 현수교 건설을 지휘한 사람은 최종원씨. 삼환건설 전무를 거쳐 현재 동명기술공단 부회장으로 있다. 현수교 길이는 국내 최장 거리인 900m. 최종원 부회장은 “광안대교 현수교는 순수 우리 기술로 만든 최초의 현수교로 3만톤의 2층 강교를 직경 60.6cm의 케이블 2개로 지지하는 형태의 교량”이라고 설명했다. 최부회장은 또 “국내의 기존장비로는 시공이 불가능해 해상플랜트선, 대구경 장비 등 새로운 장비들을 도입했고 잭업바지선, 트러스 가설용 작업다운 설비 등을 신규로 제작했다”고 말했다.
다시 조창국씨 인터뷰로 돌아가본다.
- 현수교 주탑을 콘크리트가 아닌 강제(鋼製)로 한 이유가 뭔가.
"주탑은 현을 걸어두는 곳이라 모든 힘을 받는다. 현수교는 주탑이 무너지면 교량이 다 무너지는 것이다. 콘크리트로 설계하면 수명이 50년간다. 반영구적이다. 그렇지만 강제로 주탑을 만들면 비용은 1.5배 더 들지만 수명은 50년 더 간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콘크리트 다리가 무너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교각 속의 철근이 세월이 흐르면서 부식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해상 콘크리트 구조물의 경우 수명이 30년을 넘기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 광안대교는 기대 수명이 200년이라고 주장하는데, 근거는 뭔가.
"모든 철근에 에폭시 도장을 한 다음 시공했다. 철근을 방식(防蝕)하려면 에폭시 도장을 해야 한다. 에폭시 도장을 하면 최초 설계비용에서 1.6배 늘어난다. 하지만 다리 수명은 최소 100년 연장된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는 완공한 지 80년이 넘었지만 멀쩡하다. 앞으로도 100년은 더 갈 것이다. 일본의 다리 수명은 200년, 프랑스의 다리수명은 300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50년 수명의 다리밖에 없다. 광안대교는 설계 수명을 100년으로 했으니 유지관리만 잘하면 100년을 더해 200년이 된다."
인터뷰가 두 시간째 되었을 때 그는 "우리나라 사람은 작은 돈을 아껴서 결과적으로 큰 돈을 낭비하는 일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토목기술자로서 천번에 한번 올까말까한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공무원을 그만두더라도 역사에 남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