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권력의 심장부 백악관이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고 불타는 '백악관 최후의 날'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미국인들이 상상하는 가장 끔찍한 시나리오를 거의 만화적인 상상력으로 옮겨놓았다.

국내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백악관 최후의 날'(Olympus Has Fallen ·안톤 후쿠아 감독 )의 상당수 대화 장면엔 한글 자막이 없습니다. 극중 악당을 북한인들로 설정했기에, 수많은 장면들이 한국어 대사로 진행되기 때문이죠.
 
북한인 테러리스트들이 백악관을 공격해 미국 대통령(아론 에크하트)까지 인질로 붙잡고 미국 내 모든 핵 미사일을 장악하려 하는 비상사태가 발생하자. 전직 백악관 경호원 (제라드 버틀러)이 잠입해 전면 대결을 벌입니다. 이 만화 같은 설정에서 느껴지듯 '백악관 최후의 날'은 단순하다 못해 어이가 없는 스토리의 영화입니다. 영화적 새로움을 찾아내기란 어렵습니다. 갇힌 공간에서 홀로 악당을 상대하는 영웅의 무용담이라는 스토리의 골격부터가 '다이 하드'의 복사판에 가깝습니다.
 
지금까지의 그 어느 할리우드 영화에서보다도 한국어를 많이 들을 수 있다는 건 분명 새로운 체험입니다. 하지만 우리말이 세계 최악 테러리스트들의 언어가 된 게 별로 반갑지는 않습니다. 북한 공산 세력의 도발에 대해 영화 속에서 미국이 응징의 칼을 뽑아드는 게 그다지 통쾌하게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그런 걸 느끼기 이전에 영화의 완성도 자체에 대한 너무 큰 불만이 보는 사람의 머릿속을 채우기 때문입니다.
 
'다이 하드'의 뼈대를 그대로 따라가면서도 '다이 하드' 식의 재미와는 담을 쌓은 듯한 이 영화는 예상대로 많은 관객들에게 엄청 두들겨맞고 있더군요. 온갖 혹평이 난무하니 완성도에 대한 비판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미군이 철수해 버리면 남한은 바로 북한의 먹잇감이 될 것처럼 그리고 있는 영화 속의 정세판단에 대해서도 새삼 시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느낀, 한국인에 대한 할리우드 일각의 무관심과 무지에 대해서는 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악관 최후의 날'에서 미국 백악관을 방문한 한국 '총리'를 미국 대통령이 맞이하며 악수하는 장면. 한국 총리가 지나친 저자세를 보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인류 평화를 위협하는 악당의 무리가 하필이면 동족인 것은 어쨌든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이해할 만한 일이기는 합니다. 문제는 ‘코리아’의 모습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있는 데 있습니다. 리얼리티를 살리려는 기본적 노력조차 게을리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우선 영화에 나오는 한국 최고위 정치 지도자의 묘사부터가 완전히 '3류'입니다. 북한의 군사적 도발로 국제적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백악관에서 열리는 한·미 최고위급 회담의 미국쪽 당사자는 대통령인데 한국쪽 당사자는 '총리'로 나옵니다. 요즘 이슈가 됐듯 '격'이 안맞습니다. 당연히 한국 대통령이 상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혹시 한국을 내각책임제 국가로 오해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게다가 영화에서 '미스터 리'로 호칭되는 '한국 총리'의 어설픈 면면은 한국인들을 불쾌하게 하고 분노하게 할 만합니다. 캐스팅부터가 무성의합니다. 고의인지 실수인지는 몰라도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 역을 감당하기엔 너무도 젊고(어리고), 카리스마 약한 배우를 한국 최고 지도자 역으로 썼습니다.
 
40대 초반의 비즈니스 맨 같은 느낌의 '한국 총리'가 보여주는 행동들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는 대목에서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고 왼팔을 꺾어 허리춤까지 올립니다. 한국에서 흔히 아랫 사람이 지체 높은 어른과 악수할 때의 모습입니다. 이건 실제 한·미 정상회담의 상황과도 전혀 맞지 않고 한국인들 자존심만 건드릴 뿐입니다.
 
북한 테러리스트의 리더 이름은 실소를 자아내게 합니다. 한국계 미국배우 릭 윤이 맡은 이 인물의 극중 이름은 '강연삭'입니다. 한국에서 이름으로 붙여질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글자를 골라 붙였습니다. 한국어 이름의 음절들에 관한 최소한도의 관심도 없이 그냥 대충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에서 미국인들은 이 테러리스트의 성을 거의 '갱(gang)'에 가깝게 발음합니다.)

'백악관 최후의 날'에서 미국 국방장관을 납치해 난폭하게 몰아붙이고 있는 북한 테러리스트 강(릭 윤).

한국인과 북한인 역 배우들의 캐스팅과 그들이 빚어내는 캐릭터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영화속 한국인·북한인 역 배우들을 보고 있으면 한국인과 아시아인의 얼굴에 관한 무지가 읽혀집니다. 강연삭의 얼굴과 체격은 신념으로 무장한 테러단 지도자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근육으로 무장한 건장한 행동대원에 훨씬 가깝습니다. 북한 테러단 대원들도 한결 같이 과격하고 무식하고 무표정한 인물들로만 묘사됩니다. '다이 하드' 시리즈의 악당들에게서 보이는 최소 한도의 자기 세계나 개성도 부여되지 않습니다. 무성의의 결과일 뿐만이 아니라 아시아인 얼굴에 대한 무지의 결과 아닌가 합니다.
 
북한 출신 테러리스트가 상당 기간 신분을 숨기고 한국에서 최고 지도자의 경호를 맡고 있다가 미국까지 따라와 백악관에 잠입했다는 대목에선 할 말을 잃게 됩니다. 대체 영화 제작진이 한국을 어떤 나라로 여겼기에 그런 한심한 일이 가능한 땅인 것처럼 우리 나라를 묘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할리우드 영화 속 한국인 묘사가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조엘 슈마허 감독 1993년작 '폴링 다운'에서 슈퍼마켓 주인인 코리언은 잔돈하나 바꿔주는데도 물건 살 것을 요구할 정도로 이익만 따지는 장사꾼으로 나옵니다. 볼프강 페터센 감독 1995년 작 '아웃브레이크'에서는 치명적 에볼라 바이러스를 미국 땅으로 전염시키는 사람이 불법적으로 원숭이를 반입한 한국인 선원으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할리우드 영화 속 한국인 묘사란 스쳐 지나가는 정도로 비중이 적었던 데 비해 이번 '백악관 최후의 날'은 선-악 대결 스토리의 한 축을 맡는 테러단 전원이 북한인이어서 유례없는 비중으로 한국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다만,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평단과 관객 다수에게 혹평을 받아, 많은 사람이 관람할 가능성은 적어 보이니 다행이라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