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을 여는 순간 "후~! 후~후~~!" 인공호흡기를 통해 전해지는 거친 숨소리가 방문자의 가슴을 후볐다. 신장 2m가 넘는 거구의 환자는 침대에 누운 채 나를 응시하지만 난 그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눈으로만 대화가 가능한 그를 보는 순간 내 눈자위가 젖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그와 눈인사를 나누고 악수를 했다. 순간 그의 얼굴에 밝은 기운이 비쳤고 손에서도 온기가 느껴졌다. 옆에 있던 어머니 손복순(72)씨는 "반갑다고 인사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와 눈으로 하는 대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ㅇㅗㅏㅈㅜㅅㅕㄱㅗㅁㅏㅇㅜㅓㅇㅛ(와주셔 고마워요)." 대화는 글자판을 든 어머니 손씨가 자음과 모음을 가리킬 때 박씨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반응하는 것을 포착해 글자를 조합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12년째 루게릭병 투병 중인 박승일(42)씨와 그를 돌봐온 어머니 손복순(72)씨. 온몸이 마비된 박씨는 눈꺼풀의 희미한 움직임에 의지해 주변 사람과 의사소통을 한다.

농구선수 출신 박승일(42)은 12년째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삭경화증) 환자로 살고 있다. 온몸이 마비된 상태로 눈으로만 세상과 소통한다. 그가 6월 4일 세상 속으로 나간다. 이날 오후 7시 30분 서울 광화문 KT올레홀스퀘어에서 자신과 같은 루게릭병 환우들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 행사 '희망콘서트'에 출연하기로 한 것이다.

1일 경기도 용인시의 자택을 찾아갔다. 박씨에게 "간밤에 뭘 했느냐"고 묻자 "127ㅅㅣㄱㅏㄴㅇㅕㅇㅎㅗㅏ(127시간 영화)"라고 했다. 그가 본 영화엔 미국의 블루존 캐니언 등반에 나선 주인공이 떨어진 바위에 팔이 짓눌리자 127시간 동안 사투를 벌이다가 살기 위해 결국 자신의 팔을 잘라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박씨는 "나도 할 수만 있다면…"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에서는 닦아도 닦아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박씨는 2002년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뒤 지금까지 전신마비 상태로 투병 중이다. 루게릭병은 운동신경 세포가 마비되면서 근육을 마비시키지만 촉각·후각·청각 등 모든 감각과 의식이 살아있기 때문에 극도로 고통스러운 병이다.

박씨는 2m2㎝·85㎏의 장신 농구 선수였다. 기아차 농구단에 입단했다가 미국으로 농구 유학을 떠났고 이후 2002년 현대 모비스 코치로 발탁돼 금의환향했다. 그러나 그해 갑작스러운 근육 이상과 함께 루게릭병 판정을 받았다. 의사들은 진단 후 "통상 생존 기간이 5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씨는 11년을 넘겨 초인적인 투병을 하고 있다. 강성웅 강남 세브란스 호흡재활센터장은 "승일이는 루게릭병 환자의 최종 단계인 눈동자만 움직일 수 있는 상태지만 강한 투병 의지로 일반 사례를 뛰어넘고 있다"고 말했다.

박씨는 2004년 인공호흡기를 달면서 목소리를 잃자 신체 중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눈을 이용한 안구 마우스로 대화했다. 미세한 눈꺼풀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특별한 마우스였다. 안구 마우스를 통해 인터넷에 루게릭병 카페를 만들어 매일 자신의 상태를 세상에 알리면서 루게릭병 환자에 대한 관심을 유도했다. 그는 루게릭병 환자를 위한 요양병원 건립을 남은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2008년엔 안구 마우스도 더 이상 쓸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자신의 카페에 한 루게릭병 환자가 "총 맞았느냐? 요양병원에 가게. 요양병원에 가면 가족에게 버림 받아…"라는 댓글을 올린 것을 보고 쇼크를 받은 게 원인이었다. 댓글을 본 박씨는 며칠 동안 온몸에 고열이 났다. 일주일을 앓고 난 뒤 안구 마우스를 작동하려 하자 마우스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우스가 수용할 만한 초점이 더이상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박씨는 절망감에 자살을 기도해 응급실에 실려 갔으나 기사회생했다. 그는 이후 안구 마우스를 기증하고 대신 글자판을 이용한 원시적인 방법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박씨는 휠체어에 온몸을 고정한 채 6월 4일 희망콘서트에 참석한다. 개그맨 이홍렬의 사회로 가수 션과 이수영이 출연하는 이 행사의 수익금은 전액 2000여 국내 루게릭 환자를 위한 요양병원 건립 기금으로 사용된다. 박씨는 콘서트를 앞두고 미리 준비한 글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조용히 살아도 어딘가에서 우리 친구나 동료가 혼자 아파하고 있으니 관심을 가져주세요. 루게릭병은 누구에게나 발병할 수 있어요." 박씨는 이미 몇 년 전 부모님 몰래 장기 기증을 약속했을 정도로 맑은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