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찌나 허술한지 코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런 B급도 못 돼는 시나리오로 어떻게 특A급은 아니더라도 이름난 배우들을 불러 모았는지 신기할 정도다. 갑자기 등장한 외계인의 침공이 더 개연성있게 느껴질 지경이다. 미국 현지에서 “국가 보안기관을 코미디로 만들었다”는 악평이 나올 만도 하다.
6월5일 국내개봉하는 할리우드 액션영화 ‘백악관 최후의 날’(Olympus Has Fallen)은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 앤턴 후쿠아(47)가 메가폰을 잡았다. 북한의 테러집단이 백악관으로 침투, 미국 대통령(애런 에크하트)과 각료들을 인질로 잡고 한반도 적화통일 꾀하고, 미국을 가난과 기아의 나라로 만들고자 한국 내 미군철수와 미국 내 미사일기지 자폭을 요구한다는 내용이다. 과거의 실수로 트라우마를 지닌 영웅 한 명이 위기에 처한 국가원수를 온몸을 던져 결국 구해낸다는 할리우드 원맨 액션물의 전형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어이없는 설정들이 하도 많아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들 때문에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다. 일일이 다 언급하기도 숨가쁘다. 첫 시퀀스부터 영부인(애슐리 주드)이 눈길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경호원 마이크 배닝(제러드 버틀러)에게 훗날 영웅적 행동의 강한 동기를 심어주기 위함이다. 너무 흔한 클리셰라 굳이 넣었어야 하는지도 의문인 데다 미국 대통령 일가에 대한 경호가 이토록 엉성해도 되나 싶기도 하다. 어찌됐든 이 사건으로 경질된 마이크는 18개월 뒤 방미한 한국의 총리(경 심)를 사설경호업체 직원신분으로 호위하게 된다. 그러다 북의 테러리스트들을 대적하게 되는데, 그는 여전히 백악관 대통령 전용 위성전화 보관금고의 비밀번호까지 알고 있다. 경호원들 교체 이후 1년반 동안이나 주요 통신시설의 접근번호 하나 바꾸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애매하게 설정돼있기는 하지만 백악관을 무너뜨리며 공격한 이들은 북한군 소속이라기보다는 30명으로 구성된 KFU라는 일개 테러집단이다. ‘망작’이라는 욕을 먹고 한국에서는 개봉도 못한 ‘레드 던’(2012)은 북의 특공대가 미국 본토로 진격한다는 내용인데, 차라리 이게 더 현실성 있게 느껴진다. 이들에게 당할만큼 미국의 방위체제가 형편없다는 것을 어떻게 납득하란 말인가. 정체불명의 군용기가 영해도 아니고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DC 백악관으로 날아들 때까지 미국 공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무리 영화라지만 황당하다. 단체 관광객을 가장해 들어온 테러집단 저격수들은 그렇다고 치자. 그들이 남아메리카 게릴라같은 복장을 하고 백악관을 점령해버릴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도 그렇지만, 미군 방어체계는 하늘까지 뻥 뚫려있다는 말인가.
테러집단의 수장 강(릭 윤)도 성형수술은커녕 별다른 신분세탁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한국정부는 국무총리의 방미수행원으로 북한 출신을 기용한다는 말인가. 미국정부는 강이 아버지가 북에서 사형당하고 어머니는 지뢰를 밟고 숨진 비무장지대(DMZ) 인근 출신으로 2004년 영국대사관 폭발사건을 주도하고 파키스탄에서 우라늄 농축기술을 북한으로 빼돌린 것을 즉시 파악했다. 한국정부에게는 이 수준의 정보력도 없다는 것을 믿으란 말인가.
한국 관객으로서 기분 나쁜 점도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대통령과 부통령이 모두 인질이 되면서 미국 하원의장 트럼불(모건 프리먼)이 직무대행을 맡아 강을 대응하는데, 한국의 안위가 미국에게만 달려있는 속국처럼 묘사되는 것이 불쾌하다. 오락영화에서 세세하게 한국 대통령이나 고위 관료가 이 대책회의에 참석하는 것까지 보여줄 여지는 없겠지만, 사태가 모두 끝난 후에야 “서울과 평양에 연락하라”고 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주권에 대한 모욕이다. “코리아를 잃게 된다”는 대사의 번역자막에 ‘우방’이라는 수식어를을 슬쩍 얹기는 했으나 국내 관객의 심기를 고려한 의역에 불과하다.
미국을 비롯한 비 한국어권 국가에서는 별 상관 없을 수 있겠지만, 영 어색한 한국어도 실소를 자아낸다. 한국어 부분만 성우를 고용해 후시녹음으로 덧입힌 듯하다는 것도 몰입도를 떨어뜨린다.
지난 3월 인터뷰에서 이병헌(43)은 “뉴올리언스에서 ‘지아이조2’를 찍고 있을 때 ‘올림퍼스 해스 폴른’(‘백악관 최후의 날’ 원제) 출연 제의가 왔는데 스토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했다”고 밝혔다. 참 잘한 선택인 듯하다. 차인표(46)가 ‘007 어나더데이’(2002)에서 북한군 문 대령 역을 거절하면서 한국배우들의 할리우드 영화 배역 선정에 일정한 기준이 자리잡게 된 것 같다. 미국에서나 세계시장에서의 인지도로 돈과 명성을 얻게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활동 기반인 한국시장 관객의 비난을 극복하기는 힘들테니까. 결국 문 대령 역은 ‘레드 던’에도 출연한 재미동포 배우 윌 윤 리(38)에게 돌아갔고, 이병헌이 거절한 강 역은 역시 ‘007 어나더데이’에 출연한 또 다른 재미동포 배우 릭 윤(42)이 맡게 됐다.
액션의 질도 좋게 말하면 고전적, ‘쌍8년도’ 스타일이다. 브루스 윌리스 주연 ‘다이하드1’(1988)이 연상된다는 얘기가 많다. 직접적인 칼질과 머리통을 바로 날려버리는 총질로 좀 더 잔인해졌다는 것이 좀 ‘진보’된 점일까. 요즘 영화들에 비해 CG 수준도 그저 그렇다. 다만, 7000만 달러(약 780억원)라는 제작비를 감안했을 때는 3월22일 개봉해 21일까지 미국에서만 9690만 달러를 비롯, 세계에서 1억3198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으니 기대 이상이다. 비슷한 내용으로 6월 말 미국개봉을 앞둔 재난영화의 귀재 롤랜드 에머리히(58) 감독의 ‘화이트하우스 다운’이 1억5000만달러로 배 이상의 제작비를 들인 것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욕을 먹어도 시청률만 높으면 그만이라는 ‘막장’ TV드라마처럼 북한의 미국침략이 리얼리티를 떠나 미국 내 보수우익 관객들에게는 꽤나 먹히는 설정인가 보다. 지난해 추수감사절 시즌에 현지개봉한 ‘레드 던’도 무리한 설정에도 불구, 보수성향이 짙은 미국 중북부를 중심으로 의외의 흥행성적을 올렸다.
‘백악관 최후의 날’ 현지개봉일에 맞춰 북은 ‘불바다’ 영상까지 공개하면서 이 영화의 흥행에 불을 붙였다. 2월에는 북의 대남선전용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가 유튜브에 자국의 3차 핵실험을 정당화하고 미국을 비방하는 내용의 영상을 연달아 올렸다. 미국 본토와 성조기, 오바마 대통령 등이 화염에 휩싸이는 장면을 담고 있다. 3월에는 ‘전쟁의 아성에 불벼락치리’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미국 의사당과 폭발 장면을 합성해 내보내면서 의사당과 백악관을 혼동해 “백악관이 장거리 미사일의 조준경에 잡혔다. 전쟁의 아성이 원자탄의 타격권에 들었다”라는 자막을 함께 내보냈다. 영화 속 백악관이 화염에 휩싸이고 성조기가 불타며 떨어져 내리는 장면과 그대로 오버랩된다.
안 그래도 다인종·다민족 국가의 일체감을 위해 역사와 애국심 교육을 강하게 받아와 미국이 세계의 자유와 정의의 수호자라고 철석처럼 믿고 있는 극우 미국시민들의 울분과 경각심을 자극하기에는 더 할 나위 없다. 더 큰 문제는 이 영화가 개봉한 후 한국계와 아시안에 대한 반감이 확산됐다는 것이다. 영화 중 강이 남자들뿐 아니라 힐러리 클린턴이 연상되는 여성 국방장관(맬리사 리오)까지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겉옷을 벗겨 내보내는 신이 나오면서 일부 현지 언론까지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음에도 북한 악당이 연약한 백인 여성의 목을 조르고 잔혹하게 폭행하는 리얼한 연기들로 인해 관객들의 인종차별적 분노가 우려된다”며 영화가 반아시안 감정을 조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991년 소련 붕괴로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은 자국중심으로 세계패권을 강화하려고 자신들이 원하는 국제질서 하에 종속되지 않는 나라들에게 ‘불량국가’라는 명칭을 붙였다. 특히, 북은 ‘악의 축’으로 지목되며 할리우드 영화 나름의 리얼리티를 위한 대표적 ‘주적’이 됐다. 미국 내는 물론, 세계 배급망을 쥐고 있는 할리우드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남·북한을 제대로 구분 못하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이미지가 어떻게 각인될지, 이런 고정관념이 무의식에 똬리를 틀면서 장기적으로는 한반도 국제정세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당사국 국민으로서 영 걱정을 떨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