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디자이너 우영미(54)에게 코트란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아버지'와 같다. 평생 코트를 스케치했음에도 여전히 갓 지어낸 코트 깃을 만지고 있노라면 다시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일종의 중독(中毒)임을 그도 인정했다.
"우리 아버지, 철없고 경제관념 없고, 세상 누구보다 취향이 유별났던…. 그런데 지금 내가 그리는 옷이 아버지를 닮았으니, 참 어쩔 수 없죠."
1988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우영미가 냈던 작은 가게의 이름은 '솔리드 옴므(SOLID HOMME)'. 남성복 브랜드다. 한국에서 여성 디자이너가 남성복을 만들겠다고 나선 건 그가 처음이었다. 2002년엔 처음으로 남성복을 싸들고 파리 컬렉션에 참가했다. 2006년엔 '우영미(WOO YOUNGMI)'라는 이름으로 파리에 단독 매장을 열었고, 2011년엔 우리나라 최초로 프랑스 파리 의상조합 정회원이 됐다. 우영미는 "이게 다 아버지 때문"이라고 했다.
◇아버지, 평생 닮고 싶지 않았던
우영미의 아버지는 건축 디자이너였다. 5남매를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서 낳았다. 남들은 우영미네를 두고 엄청난 부자라고 생각했다. 인스턴트 커피도 희귀하던 시절 아버지는 아침이면 시가를 물고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려 마셨다. 동네 아이들이 그 모습을 보려고 우영미네 집 창가에 우르르 몰려왔다. 옷장엔 코트만 수십 벌이었다. 가죽 코트, 니트 코트, 트위드 코트, 트렌치 코트…. 그중 하나를 골라 걸치고 나서는 아버지는 영화배우처럼 멋졌다. 문제는 돈이었다.
"남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쌀 살 돈도 없을 때가 잦았어요. 당장 학비가 없을 때도 있었죠. 그런데도 아버지는 돈이 생기면 꽃부터 샀어요. 탁자 위 레이스 장식과 장미꽃을 볼 때면 종종 울분이 치밀었죠."(웃음)
딸들은 결심했다. '아빠 같은 남자랑은 절대 안 살겠다.'딸들이 훗날 골라온 남자는 정말로 아버지와는 정반대였다. 단정하고 검박했다. 우영미는 "그런데 정작 나이 들수록 내가 아버지를 닮고 있더라. 그건 참 희한한 운명"이라고 말했다.
◇아버지, 내가 그릴 수밖에 없는
1978년 성균관대 의상학과를 입학했다. 학교에서 여성복과 남성복의 기초를 배웠다. 우영미는 "희한하게 여자 옷엔 별로 끌리질 않았다. 탄탄한 재단과 마름질이 필요한 남성복이 훨씬 좋았다"고 말했다. 반도패션·뼝뼝 같은 회사에 다니다 1988년 '솔리드 옴므'를 론칭했다.
2002년 파리 진출 후 꼬박 10년의 질주. 초기엔 호텔방에서 옷을 바느질하고 재봉틀 돌려서 쇼했다. 에이전시에서 다리미 하나 빌리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고, 거대 브랜드에 치여 패션쇼 시간을 울며 겨자 먹기로 옮기기도 했다.
반응은 2009년부터 왔다. 프랑스 '르 피가로' 등이 우영미의 컬렉션을 두고 "놀라움의 연속"이라는 극찬을 내놨다. 어느덧 '랑방' '디올 옴므' 등과 함께 꼭 봐야 하는 파리 남성복 컬렉션으로 자리 잡았다. 우영미는 "여성의 시선으로 남성복을 만든 결과"라고 말했다.
우영미는 그렇게 국내와 해외를 오가며 남성복의 새 장르를 개척했다. '남성복 캐주얼'이라는 단어도 우영미가 만들었다. 아저씨와 소년 사이 청년(靑年)의 옷이 그렇게 처음 뿌리 내린 것이다.
우영미가 지어낸 코트는 감각을 가지고 놀 줄 아는 남자를 닮았다. 매끈하고 날렵하다. 동시에 풍만하고 부드럽다. 우영미는 "내 코트가 어느 순간부터 젊은 시절 아버지의 모습을 닮았더라"고 했다. "그렇게 안 닮으려 애썼건만 그게 내 몸에 녹아서 흐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나 보죠. 아버지의 미감, 취향, 꿈. 그런 게 단추가 되고 허리끈이 되고 어깨 장식이 되더라고요."
지난달 19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홀. '솔리드 옴므'의 25주년 기념 패션쇼가 열렸다. 국내 디자이너로선 드물게 관중 4000여명이 모였고, 쇼가 끝날 무렵 관객은 함성을 지르고 손뼉을 쳤다. 우영미는 이렇게 말했다. "25살 무렵의 아버지가 무대를 걷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진 않았죠. 아버지와의 시간도, 내 쇼도 이제부터 시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