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에 사는 한모(여·72)씨는 2008년 치매 진단을 받은 남편 때문에 요즘도 하루에 몇 번씩 아찔한 경험을 한다. 냉장고에 있는 반찬통을 다 꺼내 집어던지는가 하면 가위나 칼을 휘두르기도 한다. 자기 몸을 베어 과다 출혈로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치매 증상이 악화하면서 남편의 공격적 성향은 더 심해졌다. 한씨는 "남편이 '독이 들어 있다'며 약 먹기를 거부해 더 난폭해졌고 옆에서 돌보기조차 겁나 이달 말쯤 요양원에 맡길 생각"이라고 말했다.
치매 환자들이 시간이 갈수록 기억을 더 잃게 되고 공격 성향이 강해지는 건 일반적 현상이다. 전문가들은 "시판되고 있는 약으로도 증상이 악화하는 걸 막을 수 있다"며 "환자와 가족이 치매 치료제의 효능을 제대로 이해해 믿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초기 치매 백신, 10년 내 나온다"
1993년 최초의 치매 치료제가 출시된 후 세계 곳곳의 다국적 제약사들은 연이어 치매 치료제를 내놓고 있다. 대부분 뇌 속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이 부족해지지 않도록 보충해주는 약이다. 치매는 주로 독성 단백질인 '베타아밀로이드'로 손상된 뇌세포가 아세틸콜린을 잘 만들지 못하면서 증상이 악화하는데, 아세틸콜린이 분해되지 않도록 하면 치매 진행을 늦출 수 있다는 게 기본 원리다.
대표적인 치료제로는 도네페질(아리셉트·이하 상품명), 리바스티그민(엑셀론), 갈란타민(레미닐) 등이 꼽힌다. 모두 치매 환자의 기억 감퇴를 늦추고 공격적 성향을 완화시키는 효과를 인정받고 있다. 이 약들은 1~2년가량 질병 진행 속도를 늦추고, 일시적으로 일상생활 능력을 향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근원적인 치료를 하자면 뇌세포에 들러붙는 '베타아밀로이드'를 없애야 하는데 그런 치료약은 아직 시판되지 않았다. 현재 세계 각국의 의료·제약계는 베타아밀로이드를 제거하는 '아밀로이드 백신'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얀센·화이자의 '밥피노이주맙(Bapineuzumab)'과 릴리의 '솔라네주맙(Solanezumab)'이다. 이 백신들은 임상에서 뇌 기능을 복원시키는 효과까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아밀로이드 양을 줄이는 효과는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서상원 교수는 "임상에선 중증 치매 환자에게서 백신 투여 효과를 별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치매 위험군이나 초기 치매 환자에게 투여한다면 분명히 예방·치료 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최근 얀센·화이자와 릴리는 치매 증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은 초기 치매 환자 등을 대상으로 다시 백신 임상 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또 다국적 제약사 로슈는 경도 인지장애 환자를 대상으로 '간테네루맙(Gantenerumab)'이라는 약의 부작용을 검사하는 임상 2상 시험을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올해부터 삼성서울병원과 분당서울대병원·서울아산병원·건국대병원·서울성모병원 등 5곳에서 간테네루맙 임상 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초기 치매 예방·치료 백신은 향후 10년 내에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김기웅 국립중앙치매센터장은 "이르면 3년 내로 치매 백신이 시판될 수도 있다"며 "암보다 치매를 먼저 정복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줄기세포 치료제 임상도 진행 중
국내에서는 치매 백신 외에 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매 치료제 개발 연구도 한창이다. 삼성서울병원 나덕렬 교수팀은 줄기세포를 이용해 뇌 속 아밀로이드를 청소하는 1단계 임상 시험을 끝냈다. 제대혈에서 추출한 줄기세포를 치매 쥐에게 주사했더니 뇌의 아밀로이드가 줄었고, 치매 증상이 개선됐다. 나 교수는 "뇌 속에 주입된 줄기세포가 특정 호르몬을 통해 아밀로이드를 제거하고 뇌세포가 죽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해 치매 증상을 개선하는 효과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줄기세포 치료 방식은 차병원 등에서도 임상 시험을 준비 중이다. 줄기세포 치매 치료제 상용화까지는 5~10년가량 걸릴 것으로 여러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