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서울 퇴계로 옆 인현동에 가는 걸 좋아했다. 스카라 극장 주변 빼곡하게 몰려 있던 음반사와 녹음실, 작곡 사무실과 다방을 제집처럼 드나들었고, 아버지가 쓴 노래를 낭랑한 목소리로 부르던 가수들 모습을 넋 놓고 지켜보기도 했다. 이 풍경은 소년이 자라서 의사가 되고 60을 앞둔 나이가 될 때까지 가슴 속에 또렷이 간직됐다.

'동백아가씨'의 작곡가 백영호(1920~2003) 선생의 맏아들 백경권(57) 경남 진주 서울내과 원장 이야기다. 백 원장은 최근 부친 10주기(5월 21일)와 내년 '동백아가씨' 발표 50주년을 앞두고 기념 음반 '영원한 동백아가씨의 연인 작곡가 백영호'를 만들었다. 기타를 든 백영호의 흑백사진이 앨범 재킷. 그가 작곡하고 현인·남인수·배호·이미자·문주란 등이 노래한 23곡이 실렸다.

경남 진주시‘서울내과’의 백경권 원장이 아버지를 기리며 병원 안에 만든‘백영호 기념관’에서 포즈를 잡았다. 그는“더 많은 사람이 아버지의 음악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음반 작업의 단초가 된 것은 아버지가 운명하기 전 건넨 카세트테이프 500여개다. "30년도 더 된 낡은 카세트테이프 안에 어린 시절 인현동에서 들었던 멜로디와 목소리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죠. 반년 동안 환자를 돌보는 틈틈이 테이프 500여개를 듣고 또 들으며 곡을 골라 CD 음원(音源)으로 바꿨어요. 낡은 테이프들이 많아 듣다가 자칫 툭 끊기는 것은 아닌지 많이 조마조마했지요."

'여자의 일생(이미자)' '동숙의 노래(문주란)' '나의 쥴리엣(현인)' 등 열아홉 곡을 우선 앨범에 실었다. '동백아가씨'는 이미자의 LP 음원과 함께, 소리꾼 장사익·재즈가수 말로·크로스오버가수 임태경의 리메이크 곡을 앞·뒤·가운데에 실었다. "아버지의 선율이 요즘 음악에도 충분히 어울린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세 리메이크곡을 골랐어요. 장사익 선생님이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았을 때 리메이크 허락을 받으러 아버지를 찾아왔던 기억이 생생해요. 즉석에서 특유의 구성지고 구슬픈 소리로 부르는데, 아버지도 그 자리에서 '아주 좋다'며 잘 불러보라고 했었죠."

아들에게 작곡가 백영호는 '엄하면서도 따뜻했던 아버지'이자 '재능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음악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과묵하셨죠. 하지만 제 손을 잡고 나설 때 아버지 입가에 어린 미소는 지금도 눈에 선해요. 정규 음악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부산에서 갓 상경한 철저한 '비주류'였지만, '동백아가씨'로 바로 히트 작곡가 반열에 올랐고, 주류 음악계 견제도 심하게 받았어요. 그래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셨죠."

서울의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다 1991년 처가가 있는 진주에서 개업한 백경권 원장.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그는 줄곧 아버지 음악과 가까이 있었다. 1997년 병원 안에 아버지 관련 자료들로 꾸민 '백영호 기념관'을 만들었고, 2009년에는 아버지 유작을 모은 작곡집도 출판했다.

이번 앨범은 더 많은 사람이 들을수록 적자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백 원장이 손수 제작비를 들여 만든 비매품으로, 원하는 이들에겐 발송비까지 자비(自費)로 부담하며 보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 소진(消盡)되면 기쁜 마음으로 더 찍어야죠. 더 많은 사람이 치열하게 살았던 한 음악가의 삶을 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