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래시, 기타리스트

깁슨 레스폴 기타는 포효하거나 그르릉거렸다. '짐승 기타리스트' 슬래시(48)가 조련하는 기타다웠다.

자신의 상징처럼 된 영국의 신사 모자 같은 '톱햇(top hat)'과 선글라스를 쓰고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검은색 민소매 T셔츠를 입은 슬래시가 매만질 때마다 기타는 울부짖었다.

특히, '로켓 퀸(Rocket Queen)'을 연주할 때 그는 짐승이었다. 육중한 팔 근육이 꿈틀대면서 기타를 튕겼다. 짐승을 넘어 날것의 무엇인가를 보여줬다. 중국 전통악기 비파를 연주하듯 기타를 거의 수직으로 세웠다. 이 곡을 연주한 15분여 중 약 10분을 자신의 밴드 앞에 홀로 나와 실력을 과시했다. 손가락으로 누르는 대신 슬라이드 바를 사용해 줄 위를 매끄럽게 타는 기타주법인 슬라이드를 잠깐 선보이기도 했다.

2011년 첫 단독 공연 이후 2년2개월 만에 내한, 9일 밤 서울 광장동 유니클로 악스에서 두 번째 솔로 공연을 펼친 슬래시 무대의 절정은 '로켓 퀸'을 비롯해 그가 몸 담은 미국의 세계적인 헤비메탈 밴드 '건스 앤 로지스(Guns N' Roses)'의 곡들을 들려줄 때였다.

'헤일로(halo)'로 포문을 여는 등 지난해 발매한 2번째 솔로 앨범 '아포칼립틱 러브'를 기념하는 투어였지만 건스앤로지스의 노래들이 흘러나올 때 1500여 팬들의 환호성은 더 크게 터져나왔다.

역대 최고의 기타 도입 리프(riff) 중 하나로 손꼽히는 건스앤로지스의 '스위트 차일드 오 마인(Sweet Child O' Mine)'은 화룡점정이었다. 2층 지정석의 팬들도 모두 일어났다. 노래 뿐만 아니라 전주, 간주, 후주의 멜로디까지 '떼창'하는 마니아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앙코르 역시 본 공연 못지 않았다. '웰컴 투 더 정글(Welcome to the Jungle)' '파라다이스 시티(Paradise City)' 등 역시 슬래시의 기타 리프를 통해 귀에 익은 건스앤로지스의 곡들로 공연장은 들썩였다.

슬래시는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건스앤로지스 전성기의 주역이다. 결성 24년 만인 2009년 12월 건스앤로지스의 첫 내한 공연은 명성에 살짝 못 미친 감이 있었다. 팬들을 무려 2시간20분 간 기다리게 하는 등 악동 기질은 여전했으나 원년 멤버가 보컬 액슬 로즈(51)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슬래시의 이날 공연은 일면 건스앤로지스의 내한공연 때보다 더 건스앤로지스의 공연 같았다. 록 기운으로 충만했다.

슬래시는 당연하고, 밴드 자체의 실력도 상당했다. 특히 슬래시의 첫 내한공연 때도 함께한 보컬 마일스 케네디(44)는 특유의 쇳소리로 고음을 무난히 소화하면서 화려한 무대 매너까지 뽐냈다.

가타부타 특별한 말을 꺼내지 않은 슬래시는 약 2시간 남짓한 공연 내내 카리스마를 잃지 않았을 뿐더러 쉰에 가까운 나이에도 섹시함을 자랑했다. 슬래시를 포함한 밴드의 강렬한 연주가 끝난 뒤 잔향처럼 남은 하울링 사운드가 청중의 아쉬운 발길을 배웅했다.

이날 오프닝 무대는 시원하고 강렬한 연주력이 인상적인 펑크록 밴드 '옐로우 몬스터즈'가 꾸몄다. 모던 록 1세대 밴드로 통하는 '델리 스파이스'의 드러머 최재혁(38)과 '마이 앤트 메리'의 베이시스트 한진영(37), 펑크 밴드 '검엑스'의 이용원(33)이 의기투합한 밴드는 슬래시와 기념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애초 슬래시와 옐로우몬스터즈는 이날 세계적인 얼터너티브 메탈밴드 '데프톤스'와 함께 '메탈페스트 2013'을 펼치려고 했다. 그러나 데프톤스가 팀 사정으로 내한을 포기하면서 슬래시 단독 공연의 모양새를 갖추게 됐다. 하지만 이날 공연은 데프톤스의 불참에 대한 아쉬움을 충분히 달랠 만했다.

공연이 끝난 뒤 자신의 기타 피크를 객석에 나눠준 슬래시는 트위터에 "서울의 오늘밤은 군중이 죽여줬다! 심하게 좋은 시간이었다!"(KILLER crowd in Seoul tonight! Good fxxking times!)고 남겼다. 내한 공연 직전 e-메일을 통해 "한국팬들은 지금껏 내 공연을 찾아온 팬들 중 최고"라고 했던 그의 말이 하울링처럼 남았다.

액세스ENT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