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퀸의 자살, 이해할 수 있어요. 더 이상 창작이 나오지 않으면 나 또한 땅속으로 들어가고 싶을 거예요."

파리를 주무대로 활약하는 재불(在佛) 패션 디자이너 문영희는 "나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크리에이터(creator)"고 했다. "40세에 극단적 선택을 한 영국의 천재 디자이너 알렉산더 매퀸도 창작의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파리의 패션 기자들에게 'MOON (문)'은 아방가르드(전위예술)의 상징이다. 1995년부터 올봄까지 18년간 파리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에 한 시즌도 빠짐없이 참가해온 관록의 디자이너. 그의 작품은 매퀸, 샤넬, 디오르, 아르마니, 마크 제이컵스 등 세계적 디자이너의 옷과 함께 보그, 엘르, 마리클레르 같은 유명 잡지를 장식한다.

군화에 블랙 진 차림을 즐기는 문영희씨는“나이는 밝히지 말아 달라”며 웃었다. 오른쪽 사진은 드가의 발레리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2011년 작품. 와이셔츠 칼라와 발레복을 접목해 화제를 모았다.

오는 7일엔 프랑스 정부로부터 국가공로훈장(문화예술 부문)을 받는다. 한국 출신 패션 디자이너로서는 처음이다. 루이뷔통의 마크 제이컵스가 그녀보다 먼저 이 훈장을 받았다.

문영희는 오히려 한국에서 무명(無名)이다. 지난 3월 서울컬렉션에 참가한 뒤 훈장 수여식에 참석하려고 서울에 머물고 있는 그는 "미련곰퉁이처럼 옷만 만들지 내 자랑엔 젬병인 데다 사람들을 널리 사귀지 못하는 성격이라 한국엔 이름을 알리지 못했다"며 웃었다.

파리로 주무대를 옮기기 전인 1980년대까지만 해도 문영희는 '문부티끄'란 브랜드로 모국에서 명성을 떨쳤다. "일본 레나운이란 회사에서 일하다 1975년 '문부티끄'를 열었는데, 한국에는 거의 처음 선보이는 '캐주얼'풍이라 많은 분이 좋아했지요."

잘나가던 사업을 접고 파리로 간 이유는 예술을 향한 결벽에 가까운 열정 때문이다. "디자이너라면 파리 무대에서 겨뤄봐야 하는 것 아닌가, 굶어 죽더라도 창작의 나래를 펼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목마름이 컸어요."

물론 설움이 많았다. "조그만 동양 여자가 운 좋게 파리에 왔지만 얼마 못 갈 것이라고 여겼는지 눈길도 안 주데요(웃음)."

문영희는 "파리는 재능과 근성만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중학 시절부터 몰입해온 '패션 본능'이 밑천이었다. 오로지 파리로 가기 위해 불어(성균관대)를 배웠고, 대학원(이대)에서 패션을 공부했다. "고집스럽다 싶을 만큼 작업하죠. 공장 원단은 안 써요. 원사(실)부터 일일이 지정해 원단을 만들고, 내추럴 염료만 쓰고요. 내가 원하는 빨강이 나와야 하는데 어떡해요?(웃음)"

그런 결벽을 패션 디자이너들 꿈의 무대인 '프레타 포르테'가 인정했다. 파리에 진출하려는 한국 디자이너들에게 그는 좋은 스승이다. "재창조가 중요해요. 한복선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한글을 그대로 프린트한 옷이 결코 한국적인 게 아니거든요." 스타 모델을 선호하는 한국 패션계에도 쓴소리를 했다. "그 옷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모델이 최고지요. 또 쇼의 주인공은 디자이너인데 왜 연예인들을 앞세우는지 모르겠어요."

60대이지만 그의 작업은 여전히 경쾌하다. 드가의 발레리나에 꽂혀서 2011년엔 잠자리 날개 같은 시폰 드레스에 와이셔츠를 접목한 옷을 탄생시켰다. 2012년엔 몬드리안의 색채와 면 분할에 영감을 얻어 옷을 제작했다. "아이디어요? 1시간에 걸쳐 집과 작업실을 걸어서 오갈 때 얻지요. 그래도 안 떠오르면 노트르담성당 앞에서 기도합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