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크 쉘터'의 한 장면. 폭풍의 습격을 피해 딸을 안고 숨을 곳을 찾는 상황이란 커티스(마이클 섀넌)에겐 가장 끔찍한 일이다.


제프 니콜스 감독의 '테이크 쉘터'(Take Shelter)를 보고 나니 심장 박동 수가 조금 올라간 듯한 기분이 됐습니다. 우리 마음 속 불안과 두려움이 삶을 어떻게 황폐하게 만드는지를 '테이크 쉘터'만큼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도 요 근래 드물었던 듯합니다.

영화 시작하고 20분쯤 지나니 '작고한 프로이트 박사가 보면 아주 흥미로울 영화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공 커티스(마이클 섀넌)가 겪는 고통스런 상황들은 편집증, 불안신경증, 피해망상증의 전형적인 증상처럼 보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생기는 마음 속 생채기들이 그런 마음의 병을 일으키게 한다지요.

커티스는 남편이자 아빠로서 한 가정을 이끌며 열심히 그리고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부터 끔찍한 문제가 점점 삶을 뒤흔들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다가올 위험을 경고라도 하는 듯한 악몽을 자주 꾸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검은 구름에서 누르스름한 빗물이 떨어지는 '테이크 쉘터'의 한 장면. 커티스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을 대표하는 이미지다.



커티스의 악몽은 영화 첫 장면에서부터 보여 줍니다. 거대한 검은 구름이 뒤덮어 컴컴해진 하늘에서 누르끼리한 괴상한 빗물이 후두둑 떨어지고 폭풍이 몰아칩니다. 자연재해 뿐이 아닙니다. 자기가 키우던 개에 물려 피를 흘리거나, 빗속에 운전하던 중 누군가가 차를 습격해 가장 아끼던 딸이 납치되는 악몽도 꿉니다.

문제는 커티스가 꾸는 악몽들이 '잊어버리면 그만인' 꿈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구체적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애견이 자신을 물어뜯는 꿈을 꾼 뒤에 커티스는 그 개를 집에서 내쫓으려고 하다가 아내와 충돌합니다. 악몽 속에서처럼 폭풍에 휩쓸리면 안되겠다며 커티스는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폭풍대피소(storm shelter)를 자기집 마당에 만들었다가 아내와 또 한 판 붙습니다.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인데 남편이란 자가 한 마디 상의하지도 않고 적지않은 돈을 이상한 일에 쏟아부었으니 화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테이크 쉘터'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커티스 가족의 아침 식사 장면. 어린 딸은 소리를 들을 수 없어 아빠는 수화로만 이야기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 커티스의 '특별한 행동'때문에 마침내 그의 사회 생활과 가정생활에 조금씩 금까지 가기 시작합니다. 직장 동료가 자신을 향해 도끼를 휘두르는 악몽을 꾸자 커티스는 경영자를 찾아가 그 동료를 다른 데로 전출시켜 달라고 간청합니다. 죄없는 그 동료는 원하지 않던 근무지로 옮겨가는 불이익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커티스가 회사에서 곤경에 처합니다. 회사 중장비를 무단으로 가져다 자기 집 마당에 폭풍 대피소를 만드는데 쓴 사실이 경영진에게 발각된 것입니다. 커티스에게 당한 동료가 커티스의 잘못을 회사에 알리는 '보복'을 한 것이죠. 마침내 커티스는 직장에서 해고되는 사태를 맞습니다.

해고의 고통은 커티스에게 일반적인 직장인들의 해고보다 몇 배 더 큽니다. 어린 딸이 청각장애인이기 때문입니다. 직장 의료보험 혜택이 사라지자 딸에게 해줘야 하는 수술도 연기해야 하는 힘겨운 형편에 놓입니다. 살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그의 삶은 악순환의 수렁 속으로 빠집니다.

영화는 커티스가 자라면서 겪은 어떤 특별한 일들 때문에 이상 행동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암시를 슬쩍 주기도 합니다. 특히 의심되는 건 커티스가 어릴 때 어머니 때문에 받은 마음의 상처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젊은 시절 정신분열증을 앓다가 가출해 어린 커티스를 버렸습니다. "엄마가 마음의 병으로 가족을 지켜주지 못했는데 나도 내 가족을 지켜주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하는 불안이 커티스 마음에서 자라났을지 모른다는 추측은 꽤 그럴싸해 보입니다. 청각장애 때문에 말을 못하는 딸아이도 커티스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커티스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정신질환 때문이라고만 단정하기는 이르다는 느낌도 영화 '테이크 쉘터'의 한 쪽에 엄연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커티스의 이웃 사람들이나 회사 동료들은 그를 정신나간 사람처럼 여기지만, 커티스 본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오히려 절망합니다.

폭풍에 대비한 피난처 앞에서 서로를 보듬은 커티스(마이클 섀넌)의 3가족. 불안한 세상에서 마지막 대피처는 결국 가족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이미지다.

도대체 커티스의 정신이 이상한 것인지, 다가올 재앙도 모른 채 태평한 주변 사람이 잘못인지 헷갈리게 만들면서 영화는 진행됩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런 궁금증에 대한 일종의 답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별로 명쾌하지 않습니다. 커티스가 정신 이상인지 아닌지를 열린 결말 속에 여백으로 남겨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주인공이 정신이상인지 아닌지는 이 영화의 중요한 알맹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중요한 건 주인공이 맞닥뜨리는 공포와 불안 속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공감할 만한 부분들이 많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게 우리의 절박한 과제라는 점을 영화는 절실히 깨닫게 합니다.

세상에 사는 많은 동물들 가운데,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머리로 의식하고 두려움을 느끼며 사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고 합니다. 다른 동물에게 죽음의 공포란 당장 눈 앞에 포식자가 출현했을 때 처럼 '현재형'일때만 두려운 것이라고 합니다. 다가올 죽음의 위험에 대해 지금부터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만의 숙명인 것이죠.

앞날을 내다보고 대비하는 인간의 예지는 거대한 문명을 만드는 원동력이 됐겠지만, '테이크 쉘터'에서 보여주듯 오늘의 삶에 딴지를 걸어 좀더 힘들게 만드는 부작용도 낳은 게 아닌가 합니다. 이 영화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 힘겨워하며 고단하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어려움에 관한 은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결국 공포심과 불안감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가 우리 모두의 과제이겠죠. 세상 모두가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이 아무리 괴상한 행동을 해도 감싸고 안쓰러워하며, 끝까지 애정을 거두지 않고 손 잡아 주는 영화 속 아내의 행동에서 문제를 풀어줄 실마리 하나를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