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설계사였던 40대 A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GAP'이란 글씨가 크게 쓰인 티셔츠를 사 입었다. 의아해하는 지인들에게 그가 답했다. "나도 이제 '갑'으로 살고 싶어서." 건축가였던 그도 '갑 노릇'하는 고객(클라이언트)에게 질려버렸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최근 취업 포털 잡코리아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의 79.5%가 자신을 '을'이라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을 '을'이라고 응답한 사람의 72.7%는 '갑이 주는 스트레스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인터넷에선 '갑질(갑의 부당 행위)' '네가 갑이다' '갑 마인드'란 유행어를 넘어서서 '수퍼 갑' '울트라 갑'이란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한쪽이 '무한권력'을 행사하고, 다른 쪽은 '무한 봉사' '무한 비굴'을 강요 당한다는 피해 의식이 깔려 있다.
'갑을 관계'가 소재인 코미디나 드라마도 있다. 얼마 전 끝난 '개그콘서트'의 '갑을 컴퍼니'는 직장 상하 관계에 적응하는 신입 사원의 애환을 그렸다.
드라마 '직장의 신'은 월등한 능력을 갖춘 계약직 근로자 '미스김'이 정규직을 압도하는 내용이다. '을'이라 믿는 시청자에게 대리만족감을 준다. 출판계의 내부 비리를 고발한 인터넷 카페 '대나무숲'은 '을'을 자처하는 이들이 각종 부당 사례를 고발하는 공간이다. 객관적 사실관계를 따지는 언론의 도움 없이 일방적으로 "나는 이렇게 당했다"는 주장도 SNS나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을의 발언' '을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DB '미디어가온'을 검색한 결과, '갑을 관계'나 '갑을 문화'라는 말의 용례가 나타난 것은 2004년이다. IMF 사태 이후 민주화·정보화의 진전과는 반대로 일부 대기업에 권력이 집중되는 분위기가 팽배하면서, 강자와 약자의 관계를 '갑을'로 치환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 세계 15위 경제 규모지만 투명성 지수는 45위(지난해 말 기준)에 그치는 사회 현실이 '갑을 관계'에 투영돼 있다.
차명호 평택대 피어선심리상담원장은 "갑을이란 말의 유행은 역으로 압축 성장 시대가 끝나면서,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뀌거나 불분명해지는 시대가 닥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쟁력'이 '갑을'을 대체하기를 희구하는 심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갑을 관계'에 대한 집착은 '승복하지 않는 문화'를 만들어낸다는 지적도 있다. 사회적 계약 관계, 혹은 상하 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갑의 횡포'라 치부하는 '집단적 핑계'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