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한 아파트에서 고등학교 3학년인 김모(18) 학생이 집 건너편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3월 29일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은 후 3일 뒤의 일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학급 부반장을 할 정도로 활발했던 김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는 학업 스트레스로 밝혀졌다. 경찰 조사 결과, 김군은 3학년이 된 후 좀처럼 오르지 않는 성적에 많이 고민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군과 같은 반 친구 박모 학생은 지난 4월 15일 기자와 만나 “학교 다녀오겠다고 부모님께 인사한 후 갑작스럽게 자살했다고 들었다”며 “이 친구가 자살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성적 때문에 자살했다는 건 놀라운 일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바로 10일쯤 뒤 4월 12일 강남구 한 고등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며 자살을 시도한 고3 학생도 있었다. 전날 본 모의고사 성적이 좋지 않아 이를 비관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민 4분의 1이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부자 동네. 학생의 3.60%(477명)가 서울대에 진학하는 명문 고등학교가 밀집해 있는 동네. 대치동은 우리나라 교육 1번지로 불리는 곳이지만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자리하고 있다. 자녀를 학원에 보내놓고 카페에 둘러 앉은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항상 ‘누가 자살 시도를 했네’ ‘자살했는데 평판을 두려워해서 교통사고라고 위장했네’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 기자는 지난 4월 15일 대치동의 한 카페에서 작년 말 자살을 시도했던 박모(남·19) 학생의 사연을 전해들었다.
박모군이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한 직접적인 이유는 부모가 여자친구와의 교제를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서울 강남에서도 서울대 진학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사립고등학교에 다니던 박군은 초등학교 때 서울 동대문구에서 대치동으로 이사를 왔다. 외아들인 박모군의 교육을 신경 쓴 부모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사 오기 전 반에서 5등 안에 들던 박모군은 대치동에서는 좀처럼 기를 펴지 못했다. 지난 4월 17일 어렵게 연락이 닿은 박군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10년 가까이 엄마는 ‘이렇게 뒷바라지해 주는데 왜 공부 못하니’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말했다.
박군이 자살 기도 전 다니던 학원은 7개. 교과목 수업은 물론 대입 면접을 준비한다고 스피치 학원에까지 다녔다. “밤 10시 넘어 집에 들어와서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엄마가 30분에 한 번꼴로 방 안을 들여다봤어요. 몇 번이나 ‘차라리 직접 야단쳐라’고 짜증 낼 정도였죠.” 박군에게 여자친구가 생기자 어머니의 초조함은 더 심해졌다. “여자친구가 얼굴은 예뻤지만 공부를 많이 못했어요. 3개월쯤 사귀었을 때 엄마가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걸 알게 됐죠.” 박군의 어머니는 여자친구에게 ‘헤어져라’ ‘너 때문에 아들 성적이 더 떨어졌다’고 말했다. “엄마가 얼마나 쏘아붙였는지 열받은 여자친구가 다른 친구들에게 말했나봐요. 여자애들 사이에서 ‘마마보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요.”
부모와 다툼이 잦아지고 성적은 더 떨어졌다. 박군은 “엄마는 성적을 못 올리면 미래가 어두울 것이라고만 얘기하고 뭘 해도 재미가 없었다”고 말했다. 결국 박군은 손목을 그었다. “정말 죽을 각오를 하고 그었는데, 또 엄마가 저를 방해했어요. 정신이 들어보니 혼자 병실에 누워 있는 거예요. 다시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통계청이 밝힌 우리나라 10대 청소년의 사망원인 중 1위는 자살이다. 2011년 한 해에만 373명의 청소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체 청소년 사망자의 26.5%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국가 중 1위인 이 수치에 대치동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다.
작년 2월 자살한 한 대치동 학생은 “학원 다니기 힘들다”는 유서를 남겼다. 지금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이 학생의 친구는 4월 6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친구는 겨울방학 사이에 언어, 수리, 외국어 학원 세 군데를 다니고 방학인데도 매일 학교에 나가 자율학습을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대치동)에서 그 정도로 안 하는 사람은 없죠. 저만 해도 그 전날 자살했던 친구와 함께 밤12시 다 돼서 집에 들어갔어요.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친구는 공부하기 싫어했는데 부모님이 원하는 것이 많아 억지로 학원에 다녔던 게 원인이 아닐까 싶어요.”
정철희 건국대 미래교육원 교수는 “대치동에는 자녀 교육 때문에 대치동에 전세를 얻은 사람이라는 뜻의 ‘대전족’이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말했다. 작년 7월 최막중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가 조사한 ‘부동산 시장 동향’을 보면 자기 집이 있는데도 전세를 얻어 사는 사람의 비율이 강남구에만 26.4%에 달한다.
2011년 3월 자살했던 권모(당시 18살) 학생의 부모는 지난 4월 16일 기자와 만나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대치동으로 이사해왔던 것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라고 울먹였다. 권군의 가족은 대치동으로 이사 오기 전 평범할 정도로 화목한 분위기였다. 권군의 어머니는 “한두 달에 한 번은 서울 근교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고, 아이가 춤을 배우고 싶대서 방송댄스 스쿨에 등록해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치동에 이사 온 후 온 가족의 신경은 권군의 성적에 맞춰졌다.
“저는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집에 눌러앉아 하루종일 학부모 모임에 참석했다가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 주고 오는 일만 반복했지요. 아이 성적이 떨어지면 학원 수업이 별로인가 싶어 학부모들 추천을 받아 여기저기 학원을 옮겨 다녔어요. 자살 전에 6개월간 옮긴 학원만 3군데예요.” 대치동에서 거주하는 이유가 교육 때문이니만큼 대치동 학생이 가족과 주변으로부터 인정받는 가치는 오로지 성적뿐이다. “우리 아이는 성실했어요. 하지만 성적이 그만큼 나오지 않았죠. 성실함을 좀 더 칭찬해 줬어야 해요.”
대치동에 밀집한 아파트에서는 “매일같이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도 나온다. 지금은 자녀 3명을 모두 서울대, 미국 아이비리그 등 명문대학에 보내고 대치동 아줌마의 ‘리더’로 남은 김지영(가명·54)씨는 “교육비 문제 때문에 부부싸움도 많이 하지만 무엇보다 자녀와 학부모 간의 싸움이 심각해질 때가 많다”고 전했다. 이근영 연구원은 “부모 자녀 간의 의사소통 불통의 경험이 많을 때 자녀의 자살 생각은 훨씬 늘어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