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예술영화의 특징이라면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주인공들에게 일어난 일과 감정에 집중하도록 하며, 절제되고 세련된 감정표현으로 잔잔하면서도 품격있는 감동을 만들어낸다는 것일테다.
벨기에·프랑스 합작영화 ‘러스트 앤 본(Rust & Bone)’은 밑바닥 삶을 전전하는 전직 3류 복서와 자신이 훈련시키던 범고래에게 두 다리를 잃은 훈련사의 사랑이야기다. 처절하고 비애스러운 상황일 수 있지만 카메라는 그들을 마냥 동정하거나 처참하게 느껴지도록 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고 침착하게 그 상황들을 관조하면서 관객들이 서서히 밀려오는 감명 속으로 빠져들도록 한다.
잔혹한 사고의 순간이나 남자가 도박 싸움판에서 피 튀기게 격투를 하는 모습 등은 이미지로 표현, 잔인한 장면을 사실적으로 드러내 눈살을 찌푸리지 않도록 하는 것도 큰 미덕이다. 누구나 중도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자가 겪는 비극과 잘린 다리의 흉터는 섬뜩할 수도 있지만, 카메라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시선을 유지한다. 장애인 영화의 새 지평이다.
전 아내가 키우던 어린 아들을 맡게된 남자는 벨기에에서 누나와 그의 남편이 사는 프랑스 동남부의 항구도시 앙티브로 옮겨와 나이트클럽 ‘기도’를 본다. 그곳에서 싸움에 말려든 범고래 훈련사인 여자를 도와주면서 첫 만남을 가진다. 그 직후 사고를 당해 휠체어 신세가 된 여자는 동거하던 애인도 떠나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남자의 말을 기억해내고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머리가 좋지는 않지만 편견없고 순수한 정의감이 있는 남자는 커튼을 치고 방안에 갇혀있던 여자를 밖으로 끌어내 수영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물과 동물을 좋아해 훈련사가 됐을 여자는 바닷물 속에서 자유를 느낀다. “남자들이 자신을 여자로 봐주고 그들에게 욕망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좋았다”는 여자에게 남자는 “섹스가 되나 직접 해보자”고 제안하고, 그 섹스는 여자에게 자신감을 주는 동시에 함께 과거를 극복할 수 있는 치유의 힘이 돼준다. 여자는 자신을 해친 범고래를 만나러가 푸른 수족관 앞에서 범고래와 마주하고 애정표현을 하게 되는데, 이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환희의 순간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들의 사랑이 순탄할 수만은 없다. 여러 여자들과 프리섹스를 즐기고 몇 푼의 돈을 위해 싸움판에 뛰어드는 동물적인 본능에 따라 사는 남자다. 의족을 하고 우뚝 서는 여자를 바라보며 힘을 얻지만, 머리가 나빠 의도치 않게 곤란한 상황에 빠져들곤 하는 이 남자는 사랑을 깨닫기에는 너무 둔하다. 제 자식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철딱서니 없는 남자는 위기를 통해 점차 위대한 사랑에 눈뜨며 성숙해간다.
살아가면서 어찌 그저 행복하기만 하고 비감이 없을 수 있으랴. 따지고 보면 상처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완벽한 인생은 아닐지라도 두 사람은 그렇게 함께하며 한 단계 진전된 삶을 살아나갈 것이다. 그들의 삶을 지켜보며 살아나갈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영화가 주는 부수적 효과다.
남자의 이름은 알리, 벨기에 배우 마티아스 쇼에나에츠(36·Matthias Schoenaerts)가 연기했다. 187㎝의 장신으로 단순하면서도 우직한 싸움꾼 역을 매력적으로 연기해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묵묵히 감내할 줄 알게된 남자의 변화를 묵직하게 전달한다.
여자의 이름은 스테파니, 이미 미모와 연기력으로 세계적 스타 반열에 오른 프랑스 여배우 마리옹 코티띠아르(38·Marion Cotillard)가 맡았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열연을 펼쳤는데 조막만한 얼굴에 눈코입이 꽉찬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답다. 여배우로서는 두 다리가 없는 이미지를 덧입는다는 것이 대단한 도전이다. 영화는 정교한 CG작업으로 무릎아래로 양다리가 사라진 모습, 철제 의족을 한 모습 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러스트 앤 본’은 ‘녹과 뼈’라는 뜻이다. 2009년 ‘예언자’로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자크 오디아르(61·Jacques Audiard) 감독이 3년만에 내놓은 작품이다. 예술영화로서는 기록적인 220억원이라는 제작비를 들여 매혹적인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스테파니가 의족으로 다시 일어서 대형 유리 수족관 앞에서 범고래와 소통하는 모습은 눈을 감아도 선연히 떠오를 정도로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5월2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