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막바지인 1953년 3월 부산 영도의 허름한 막사에서 문을 연 서울예고는 '음악·미술 분야에서 신입생 100명을 모집하겠다'는 신문광고를 냈다. 그러나 합격한 학생은 13명. 떨어진 학생은 거의 없었다. 개학 직후 8명이 추가 입학했다. "'풍각쟁이'나 '환쟁이' 만드는 학교를 뭐 하러 다니느냐"는 사람이 많던 시절이었다.

그해 9월 서울로 올라온 서울예고는 한동안 이화여중·고 교정에 더부살이했다. 4회 졸업생인 피아니스트 신수정 전 서울음대 학장은 "학교 건물을 짓는다고 2년간 체육 시간마다 벽돌을 나른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이렇게 출발한 서울예고가 올해 개교 60주년을 맞았다. 60년간 졸업생을 약 1만6000명 냈다. 지휘자 금난새, 첼리스트 정명화, 피아니스트 김대진, 서양화가 이두식·김종학(세종대 교수), 동양화가 오용길, 윤성주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등 문화계 주역이 대거 포함돼 있다. 가수 송창식도 서울예고에서 성악을 전공했으나 중퇴했다.

1953년 3월 부산 영도의 허름한 막사에서 문을 연 서울예고의 창립 당시 모습(왼쪽), 오른쪽은 지난 2004년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린 서울예고 오케스트라의 공연 장면.

음악·무용·미술과 세 과로 이뤄진 이 엘리트 예술학교는 한국 예술의 중추들을 길러낸 곳이다. 1953년 부산 영도의 경찰 마구간을 빌려서 개최한 이 학교의 미술전을 관람한 문교부 장학관은 "앞으로 미술교육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극찬했다. 1954년 5월 서울 화신백화점 5층 화랑에서 연 전시회를 본 일본의 외신기자는 "한국의 미술교육이 일본을 현저히 앞선다"는 찬사를 보냈다. 그림물감이 없어서 화학 염료를 유리판에 개어 써가면서 땀 흘린 성과였다.

1회 졸업생인 서양화가 김지열(77) 전 이화예술학원 이사장 직무대행은 "학생보다 교사가 더 많아 미술 이론 원서를 강독하는 대학원식 수업을 했다"고 기억했다. 서양화가 박항률(15회) 세종대 교수는 "당시 3학년이면 100호짜리 유화를 그려서 졸업전을 열 정도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1963년 12월 명동 국립극장에서 연주회를 열었던 음악과는 30여년 뒤인 1997년에는 미국 뉴욕 링컨센터에서 연주회를 열 정도로 성장했다.

1982년 서울예고의 서울대 합격자는 처음으로 100명을 넘어섰다. 서울예고의 전성기는 전국적으로 예고가 확산된 1990년대까지 지속됐다. 서울모테트합창단 지휘자 박치용(27회)씨는 "1970~80년대의 고도 경제성장과 함께 예술에 대한 전반적 인식이 높아진 것도 예고 발전의 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미술계에서도 '서울예고 출신=엘리트 미술가'란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지난해 카셀 도큐멘타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문경원(33회)과 양혜규(34회) 등 '세계적 작가'들을 키워냈다.

음악과는 지금은 졸업생뿐 아니라 재학생들까지 국제 콩쿠르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고 있다. 지난 2월 러시아의 유리 바슈메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 비올리스트 이화윤(서울예고 2년)양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글로벌화'는 서울예고에 '국제 경쟁력 강화'라는 뜻밖의 숙제를 안겨줬다. 학교 관계자는 "예술 영재들이 학교를 중도 자퇴하고 조기 유학을 떠나는 숫자가 점점 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까지 서울예고 졸업생은 1만6274명. 음악 전공이 8603명(52%)이고 미술 전공 5880명(36%), 무용 전공 2150명(12%) 순이다.

다음 달 서울예고는 개교 60주년 기념 축제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연다.〈〉 5월 6일 무용과 동문 갈라 무대를 시작으로 18~25일 미술과 졸업생 특별전, 27일 음악과 재학생·졸업생의 합동 연주회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