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 필립 강은 개척자다. 그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바그너 전문 페스티벌)에 1988년 동양인 최초로 입성한 후, 후배 베이스들이 줄줄이 이 축제에 데뷔했다.

필립 강, 강병운 교수(서울대·65·사진)가 40년 만에 국내 오페라 무대에 선다. 1995년 서울대 교수로 부임했지만, 한국 오페라 무대는 극구 사양해온 그가 오랜만에 '결심'을 한 것이다.

그가 선택한 무대는 25~28일 예술의전당에서 막 오르는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 노왕 필리포 2세를 맡았다. 사실 그의 예명 '필립'도 '필리포 2세'의 독일식 이름. 그는 1981년 필리포 2세의 아리아로 이탈리아의 오페라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이 이름을 붙였다. 강 교수는 "30년간 유럽 극장에서 이 역할만 200회는 부른 것 같다"고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국 무대에 선 것은 지난 1974년 독일 유학 직전. 당시 국립극장에서 그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에 출연했다. 그는 11일 "바로 어제(10일) 오페라 연습실에서 내 65세 생일잔치를 했는데, '30대 전성기를 놓치고 뭐 하다가 이 나이에 국내 무대에 서느냐'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베르디 탄생 200주년을 맞아 공연하는 '돈 카를로'는 피해갈 수 없었다"는 게 그의 얘기. 바이올리니스트 강주미(클라라 주미 강)가 그의 딸이다.

이 오페라에서 그가 맡은 필리포 2세는 자신의 아들인 왕자 돈 카를로를 의심 끝에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아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영조와 비슷한 인물. 강 교수는 "이 오페라처럼 베이스가 복합적인 성격을 드러내야 하는 역할도 없다"고 했다. 아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아내와는 결혼했지만 둘 사이엔 사랑이 없으며, 종교재판관과는 권력 배분을 놓고 갈등한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유럽에서 후배들의 활약을 보면 뿌듯하다"면서도 "한 번 주역을 맡았다고 영원히 주역을 맡는다는 보장은 없다"고 했다. 왜일까. "가수는 악기가 몸이다. 시간이 흐르면 그 악기는 늙게 마련이라는 걸 잊지 말라."

☞필립 강은…

1948년 태어났다. 서울대와 베를린 국립음대를 졸업. '돈 카를로'의 필리포 2세로 데뷔했을 때 이탈리아 음악 전문지 '오페라'는 '보리스 크리스토프의 음악성과 로시 레메니의 연기력을 겸비한 세계적인 베이스가 나타났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