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케임브리지 동지들
유리 모딘 지음 | 조성우 옮김 | 한울
376쪽 | 2만4000원
"이제 그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나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정보관으로서의 의무이며 명예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공작의 마지막 수년을 그들과 함께했고, 공작이 붕괴하면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마무리하고 이들을 도주시키는 일에 참가했다."
이 책의 저자 유리 모딘(91)은 옛 소련 정보기관 KGB에서 정보관으로 일했던 인물이다. 그가 책 서문에서 언급한 '그들'이란, 1944년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소련 스파이로 활동했던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킴 필비, 가이 버제스, 앤서니 블런트, 도널드 매클린, 존 케른크로스 등 5명이다. 이른바 '케임브리지 5인방'으로 알려진 이 스파이들의 면모가 1951년부터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자 영국은 물론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들과 관련된 '새 뉴스'는 80년대까지 쏟아졌다.
비밀정보기관 MI6의 고위 간부 출신인 필비는 훗날 우리에겐 6·25 전쟁 발발에 영향을 미쳤고, 소련으로 망명해 자청해서 소련 땅에 묻힌 인물이다. 버제스는 MI6와 외교부 고위 간부였고, 블런트는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친척으로 영국 외교관료로 활동했다.
그동안 케임브리지 5인방의 공작을 다룬 많은 책이 발간됐지만 상상이 아닌 실제 자료를 바탕으로 쓴 책은 드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흥미롭다. 저자 모딘은 1942년 KGB에 입사해 KGB정보학교 교수로 퇴임했다. 케임브리지 5인방을 직접 관리하며 활동 초기부터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스파이망이 붕괴할 때까지 과정을 모두 지켜봤다.
책에 따르면 케임브리지대 출신 젊은 수재들은 반미(反美) 세계혁명을 위한 사명감으로 스파이가 되길 자청했다. KGB가 보낸 거액의 보상금을 "돈 때문에 한 일이 아니다"며 거절했을 정도다.
시대적 배경이 있다. 1930년대 대학을 다닌 필비를 비롯한 5인방은 뉴욕발 대공황이 유럽을 덮쳐 영국 실업자가 300만명에 육박하는 모습에 사회적 공분을 느꼈다. 젊은 지식인들은 "인민을 빈곤의 늪으로 몰아넣은 자본주의의 현실, 그리고 그 적인 소련에 새로운 사회가 창조되는 모습"(61쪽)을 지켜보며 자생적 사회주의자가 됐다. 필비는 대학 졸업 뒤 오스트리아에서 반(反)나치 활동을 하다 코민테른 공작원인 아내를 만나 KGB에 포섭됐다. 저자조차 "포섭 경위를 모른다"고 고백하는 도널드 매클린은 훗날 워싱턴 주재 영국 대사관의 1등 서기관이 된다.
이들은 영국 방첩기관의 감시 대상자와 감시 방법 등도 송두리째 소련에 넘겼다. 런던에 소재한 여러 망명정부와 대사관들의 교신 내용도 남김없이 KGB로 보고됐다. 외교 행낭을 가로채 감쪽같이 내용물만 촬영했고, 진눈깨비 내리는 겨울 런던 거리에서 직접 KGB 요원과 접선했다.
2차 세계대전의 결정적 전환점이 된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독일의 신형 티거 탱크 장갑을 소련군이 신형 포탄으로 꿰뚫을 수 있었던 것도 '5인방'이 영국에서 빼돌려준 기밀 정보 덕이었다. 독일은 티거의 장갑이 금강불괴(金剛不壞)라 믿었지만, 실은 패배가 예정된 전투에 뛰어들었던 셈이다. 처칠과 루스벨트가 비밀리에 만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결정한 것도, 심지어 미국의 원폭 개발 과정까지 모두 소련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소련이 북한 김일성의 6·25 남침 계획을 승인하는 데도 이 '5인방'의 정보가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맥아더를 '전쟁광', 스파이를 '진정한 애국자'로 그리는 등 시종일관 소련과 KGB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현실감 있다. 이념으로 뭉친 자생적 간첩망이 얼마나 자기 조국을 지능적으로 배반했고, 더불어 생명력이 끈질긴지를 방증하는 기록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