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위드 러브

‘뉴요커의 페이소스’라 불리며 1960년대 이래 매해 장편영화를 만들어오며 거의 뉴욕을 벗어나지 않았던 우디 앨런(78) 감독이 유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2012년 로마를 배경으로 한 ‘로마 위드 러브’를 만들었다.

‘매치포인트’(2005), ‘스쿠프’(2006), ‘카산드라 드림’(2007), ‘환상의 그대’(2011)를 영국에서 찍었고, 아예 유럽도시 이름을 타이틀에 내세운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한국개봉 제목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2010)과 ‘미드나잇 인 파리’(2011), ‘로마 위드 러브’(2012)는 도시가 단순배경 이상의 캐릭터가 된다.

미국인들의 유럽에 대한 ‘로망’은 우리 못지않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은 수많은 로맨스 영화의 배경이 되곤 하는데, 18일 국내개봉을 앞둔 ‘로마 위드 러브’는 오드리 헵번 주연의 ‘로마의 휴일’(1953) 이래 이토록 로마를 가고싶게 만드는 영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로마의 속살을 드러낸다. 트레비 분수부터 로마의 곳곳을 배경으로 우디 앨런이 파악한 이탈리아의 매력이 버무려졌다.

올해 6월 미국 개봉 예정인 케이트 블란쳇 주연의 차기작은 덴마크 코펜하겐이 무대인 것으로 알려졌었으나 샌프란시스코를 주무대로 뉴욕에서도 촬영됐다. 유럽순례에 지친 우디 앨런이 다시 고국으로 향했나 싶다. ‘로마 위드 러브’에서는 그의 시각으로 본 유럽도시를 만끽하는 한편 되돌아온 우디 앨런 캐릭터와 고유의 ‘마술적 리얼리즘’ 스타일이 자아내는 유머를 다시 만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찰리 채플린을 제외하고는 스스로의 색깔을 맘껏 드러내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코미디언으로 꼽히는 우디 앨런은 스스로 연기하는 신경과민적 뉴요커 캐릭터로 유명한데, 이번 작품에서 다시금 그 캐릭터를 선보인다. ‘배바지’를 입고 죽음을 두려워해 안절부절 못하는 강박적 모습으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실패한 오페라 감독 제리 역이다.

우디 앨런은 직접 정신분석 치료를 받으며 이를 작품에 적용해왔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아예 아내를 정신과 의사로 설정했다. “당신은 은퇴와 죽음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건 다 당신 판타지(한국어 자막에는 좀더 심각하게 ‘망상’이라고 번역된다)”라고 잔소리를 해대는 역할이다.한때 마술가를 꿈꾸었다던 이 노감독은 영화를 통해 ‘망상’을 모두 ‘현실화’시키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이탈리아의 대표적 특질들을 소스로 활용한 점이 돋보인다.

에피소드1. 이탈리아로 유학간 성악도가 벽돌공이 아리아를 부르는 실력에 기가 팍 죽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이탈리아인의 오페라 전통과 음악적 재능은 유명하다. 제리는 딸의 시부가 될 장의사가 샤워하며 내지르는 풍부한 성량을 듣고는 그를 오페라 무대에 세울 계획을 세운다. 문제는 그 노래 실력이 샤워할 때만 나온다는 것. 서양인들이 샤워를 하며 혼자만의 공간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는 버릇은 일반적이라는데, 이를 판타지로 풀어내는 우디 앨런식 방식이 황당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낸다. 오페라 가수가 되는 장의사 지안카를로 역은 이탈리아 유명 테너가수 파비오 아르밀리아토가 맡았다.

에피소드2. 이탈리아 하면 유명인의 사생활을 찍는 카메라맨을 일컫는 ‘파파라치’가 빠질 수 없다. 이 단어 자체가 이탈리아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에 나오는 신문사 사진기자 파파라초에서 유래한다. 파리처럼 웽웽거리며 달려드는 벌레를 뜻한다고 한다. 평소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을 정도로 언론을 회피하고 유명세를 치르는 것에 병적일 정도로 거부감을 지닌 우디 앨런의 성향은 이전 작품들에서도 드러나곤 했는데, 평범한 로마시민 레오폴도가 어느날 갑자기 스타가 되면서 겪는 일들은 우디 앨런 자신이 연기했던 ‘젤리그’(1983)의 연장선상에 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유명인이 돼 파파라치에게 시달리던 레오폴도는 기자들이 “더 특이한 사람이 있다”며 다른 이에게 몰려가며 이 ‘저주’에서 풀려나 안도하게 되는데, 이는 일순 스타를 만들었다가 효용이 다했다싶으면 금세 등을 돌려 잊혀 지게 만드는 미디어의 속성에 대한 우디 앨런의 통찰이기도 하다.

레오폴도 역은 우리에게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1997)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국민배우 로베르토 베니니가 연기한다. 그는 영화 속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탈리안의 전형을 보여주는 역할도 맡았다. 온갖 폭넓고 화려한 제스처를 사용하며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어대는 모습 말이다.

에피소드3. 신혼여행은 이탈리아로 가지 말라는 속설도 있다. 매력적인 미남미녀들이 넘쳐나서 한눈팔게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라고. 이탈리아 시골 출신의 갓 결혼한 신혼부부 안토니오와 밀리도 로마에 정착하러 왔다가 각각 이런 유혹에 빠지게 된다. 여기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로 상징되는 이탈리아 지도층의 성적 부패도 더해진다. 페넬로페 크루즈가 연기하는 콜걸 안나는 그 상징이다.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는 매우 비슷해서 빠르면 2주정도에 상대국의 언어를 익힐 수 있다는 얘기도 있는데, 스페인 여배우 페넬로페 크루즈의 이탈리아어 연기는 꽤 자연스럽다. 여행지라는 점, 또 로마라는 도시가 주는 자유로움에 취해 각기 성적 일탈을 벌이게 되는 순진한 부부의 이야기는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에피소드4. 오래된 건축물들이 그득한 하나의 예술작품 같은 도시, 로마는 건축 전공자들의 필수 방문지. 이들의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이와 함께 젊은 시절 한때를 보낸 해외유학지나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훗날 다시 방문해 되새기게 되는 흔한 경험을 판타지로 표현한다.

로마에서 휴가의 마지막 일정을 보내던 건축가 존(알렉 볼드윈)은 자신이 젊은 시절 살았던 골목을 찾다가 그곳에 살고 있다는 건축학도 잭(제시 아이젠버그)과 우연히 마주쳐 동행한다. 자신을 닮은 외양의 잭의 삼각연애사에 껴들어 참견하게 되는데, 이는 존이 자신의 과거를 되돌이켜보는 모습으로 읽힌다.

잭은 함께 유학중인 여자친구 몰래 여자친구의 친구인 3류배루 모니카(엘렌 페이지)와 바람을 피우게 된다. 모니카는 주변 남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적절히 과장과 거짓말을 할 줄 알고 각종 시를 한구절씩 외워 써먹을 줄 아는 타고난 바람둥이다. 잭이 후에 감탄하게 되는 것처럼 나이가 든 후에는 그런 뻔한 수가 다 들여다보이지만, 미숙한 시절에는 그런 허세가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이러한 우디 앨런 식 시니컬한 시선과 유머가 통쾌함을 안겨준다. 동시에 그때는 왜 그런 단순한 사실조차 몰라 후회할 짓을 저질렀을까, 하는 누구나 한번쯤은 느낄만한 회한이 공감을 야기한다.

사족. 우디 앨런의 ‘여자 취향’을 한마디 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다. 우디 앨런이 국내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계기는 여자친구인 배우 미아 패로가 한국에서 입양했던 순이 프레빈과의 스캔들 때문이다. 우디 앨런은 미아 패로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두긴 했지만, 두 사람은 이웃해 살았을 뿐 결혼은 커녕 동거도 하지 않았으며 순이는 자신의 딸이 아니라 미아 패로가 작곡가 앙드레 프레빈과 결혼했을 때 입양했던 딸이라고 강변한다.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의붓딸처럼 여겨졌던 애인의 딸과의 스캔들은 용납되기 어려울 듯.

끊임없이 10대소녀와 결혼했던 찰리 채플린처럼 우디 앨런도 상당히 소녀 스타일을 좋아하는 듯하다. 19세때 16세의 핼런 로젠과 첫 번째 결혼했었고, 12년간 사귀었던 미아 패로는 중성적이고 가녀린 소녀같은 이미지로 유명한 여배우다. 또 35살 연하의 순이와 그녀가 19세때부터 사귀어왔다. 그의 작품 ‘맨하탄’(1979)는 17세 여고생과 사귀었던 자전적 스토리를 바탕으로 했다. 그때문인지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매력적으로 그려지는 여성들이 유독 미성숙한 느낌의 소녀 스타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로마 위드 러브’에서 주변 남자들을 모두 홀리는 모니카 역의 엘렌 페이지는 155㎝가 안 되는 단신에 여전히 똘망똘망한 소녀같은 느낌을 주는 동안이다. 제리의 딸 헤일리로 출연하는 앨리슨 필 역시 동그란 얼굴형 때문에 굉장히 어려보인다. 우디 앨런은 전작인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매력과 재능이 넘치는 젤다 피츠제럴드 역을 그녀에게 맡겼었다. 왠지 순이의 동그란 얼굴과 무척 닮아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