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인터넷 서점의 '가정·실용·연애' 분야의 담당자로 일한 적이 있다. 그때, 산처럼 많은 요리책과 연애 비법서를 읽었는데, 때마침 정리한 자료들을 보다가 우연히 눈에 띄는 책 한 권을 찾아냈다. '남자 마음을 사로잡는 매뉴얼'. 재밌는 건 이 책의 저자 스티브 산타가티가 본인 스스로를 '연쇄 연애범'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인데, 이 남자의 주장은 이렇다. 범죄자보다 범죄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주야장천 연애한 자기만큼 연애를 많이 아는 천하의 나쁜 놈도 없다는 일종의 커밍아웃인 셈. 이 책은 그렇게 남자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풍부한 예시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당신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는 남자는 나름대로 멀티태스킹 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는 당신을 미소 짓게 하는 동시에 자기가 주도권을 잡는 것이다. 아마 이것을 제외한 남자의 유일한 멀티태스킹은 키스를 하면서 동시에 브래지어 끈을 푸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여자들에게 나쁜 남자의 실체에 대해 이 책은 "내가 아는 나쁜 남자나 나쁜 남자 기질이 다분한 사람은 대부분 되도록 오랫동안 자기 감정의 정체를 모호하게 숨긴다. 그런다고 거짓말하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진실한 것도 아니죠) 이렇게 감정을 숨기면 나중에 기분 내킬 때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고 폭로하기도 한다. 가장 재밌는 건 책의 거의 마지막에 나온다.
"내 친구에 따르면 남자들은 자기 인생의 반 정도를 성공하기 위해서 보내고 나머지 반은 그 성공이 헛된 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산다."
이 문장을 읽다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바로 내 친구가 몇 년 전 했던 말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자기 월급의 반 정도를 죽도록 맛집 찾아다니며 맛있는 거 먹기 위해 쓰다가, 나머지 반은 그때 찐 살을 빼기 위해 죽도록 다이어트하는 데 쓰는 것 같아." 아! 그때의 놀라움이라니. 술을 마시며 푸념 중인 그녀의 '죽도록'이란 감탄사 앞에서 친구들은 '죽도록' 공감했다.
영화 '남자사용설명서'를 보다가 그때 일이 떠오른 건, 5년째 광고 조감독으로 죽도록 일만 하는 '최보나'가 그 옛날 우리들의 '흔녀(흔한 여자)' 시절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야근 때문에 떡 진 머리카락을 감추느라 교복처럼 입고 다니는 '후드 티' 마니아 최보나는 남자가 득시글거리는 회사 분위기와는 영 무관한 존재감 제로의 일중독자다. 급기야 그녀는 깜빡 잠이 든 사이 서울로 철수한 촬영팀 때문에 외딴 바닷가에 혼자 남는다. 서울로 올라가려고 주위를 서성이던 그녀는 그날 밤, 정체불명의 '닥터 스왈스키'(스왈스키는 박영규다!)를 만나고, '남자사용설명서'라는 제목의 비디오테이프를 얼떨결에 억지로 사게 된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고 생각하지만 집으로 돌아가 비디오를 보기 시작한 최보나. 그녀는 비디오 속 닥터에게 '남자 사용법 코칭'을 받으며 서서히 인생이 뒤바뀌기 시작한다. 자신의 광고 회사 바로 위층에 사는 한류 스타 이승재와 야릇한 관계로 엮이며 성격 희한한 자기 '보스'를 제치고 광고계에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한 것.
사실 '남자사용설명서'의 줄거리는 별다를 게 없다.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에 때맞춰 개봉하는 로맨틱 코미디는 가는 방법은 달라도 우리 기대대로 '언제나' 해피엔딩으로 끝나니까 말이다. 중요한 건 닥터 스왈스키로 등장하는 박영규가 어떻게 남자 다루는 법을 '코칭'하는가와 최보나와 이승재의 '밀고 당기기'가 얼마나 재미있느냐다.
이 영화의 미덕은 끝을 향해 달려가는 소소한 에피소드가 매력적이라는 데 있다. 가령 이런 장면들. 당신과 한 섹스가 '별로'였다고 말하는 보나에게 충격을 받은 승재 앞에서 '별로' 만든 과자를 꺼내며 맛도 '별로!'인 데다가, 심지어 사이즈도 '별로!'라고 투덜대는 엔터테인먼트 대표와 매니저의 대화라든가, '보나'를 잊지 못해서 대표와 상담 중인 한류 스타 이승재의 대화 같은 것 말이다.
―나도 자꾸 생각나는 독특한 매력의 여자가 있었는데, 좀 남자 같으면서도 중성적인.
―그 아저씬 진짜 남자였고.
―뭐?
―나 턱수염 있는 거 봤다니깐.
영화에 등장하는 인천의 자유공원이나 홍예문은 아무래도 '로맨틱한 장소'란 이유로 연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게 될 것 같다. 조인성과 송혜교가 패션 화보처럼 등장하는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배경지도 홍예문이라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 알았다. 최초의 서양식 정원이란 이름이 붙은 자유공원에서 보나와 승재의 발걸음을 쫓아가보는 것도, 들고 있는 지팡이마저 예쁘게 보이는 송혜교처럼 홍예문 돌길을 톡톡 두들겨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그나저나 바닥부터 올라온 한류 스타 '이승재' 역할을 맡아 열연한 배우 오정세의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이런 질문을 발견했다. 어쩜 그렇게 따귀를 잘 맞을 수가 있나요! 이건 정말이지 내가 하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이시영은 '심지어' 복서이기도 한데!
●남자사용설명서: 광고업계 출신 이원석 감독의 데뷔작. 감독 자신의 경험을 살려 만든 작품으로 이시영, 오정세, 박영규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