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서부이촌동의 한 상가 건물 3층 계단에서 음효일씨가 동네를 내려다보며 서부이촌동의 옛모습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리도 저 건너편 마을처럼 로또 맞나 했지. 개발 끝나면 20억씩 준다는 말에 꿀꿀이죽 끓여 먹던 시절부터 여기서 버틴 보람이 있나 싶었는데…."

1952년부터 서부이촌동(서울 용산구 이촌2동)에서 살아온 '서부이촌동 토박이' 음효일(64)씨는 18일 한강대로 건너 아파트 단지가 늘어선 동부이촌동(이촌1동)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서부이촌동 개발 계획이 개발시행사의 채무불이행으로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는 뉴스가 나온지 4일째 되던 날이었다. 그는 서부이촌동을 '다리 이쪽', 동부이촌동을 '다리 동쪽'이라고 불렀다. 동부이촌동과 서부이촌동은 한강대로를 기준으로 갈린다. 두 동네는 걸어서는 20분, 차로는 5분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깝지만 동부이촌동은 '외국인이 많이 사는 부촌', 서부이촌동은 '서울의 마지막 미개발 지구'로 불린다.

음씨는 동부이촌동이 개발되고 번창하는 사이 쇠락해간 서부이촌동의 61년 역사를 몸으로 겪었다. 그는 군에서 배운 기술로 1990년대 중반까지 이곳에서 사진관을 운영해 생계를 유지했다. 음씨는 1970년대 지은 낡은 3층 건물의 2층에 산다. 이 건물이 음씨의 유일한 재산이다. "건물 주인이니까 부자겠다고? 건물 있으면 뭐하나. 세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우리 집 빼고는 놀리고 있는데…."

◇1960년대 초: "다 같이 꿀꿀이죽 먹고 살았다"

음씨가 어머니의 고향 충북 괴산에서 서부이촌동에 온 것은 네 살 때였다. 그는 어린 시절 기억 중 '꿀꿀이죽'이 가장 선명하다고 했다. "모래사장 천지에 4평(약 13㎡)짜리 하꼬방촌(판자촌)이 늘어서 있었어. 동네 한쪽에 미군 쓰레기 처리장이 있어서 처리장에서 나오는 잔반으로 죽을 해 먹고 살았지."

서부이촌동에는 50년대 말에 미8군 쓰레기 처리장이 설치됐다. 이 처리장은 60년대 말까지 있었다. 미군들이 먹다 남긴 음식물 쓰레기가 처리장으로 모였다. 이를 끓여 만든 것이 꿀꿀이죽이었다.

"돼지 먹이로 쓰겠다고 음식물 쓰레기를 가져와서는 가마솥에 끓여 팔았지. 죽에서 스팸(햄의 일종)이나 고기가 나오면 운 좋은 날이었어. 담배꽁초, 손톱 이런 거 나와도 안 놀랐지. 당시엔 그것도 없어서 못 먹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서부이촌동엔 이런 죽을 파는 '꿀꿀이집' 식당이 적어도 다섯 군데 있었다. 음씨는 "그땐 우리나 저쪽(동부이촌동)이나 비슷했다. 그 동네 사람들도 똑같이 꿀꿀이죽 먹고 살았다"라고 말했다.

◇1967년: 동부이촌동에 대단지 아파트, 서부엔 넓어지는 판자촌

판자촌이 늘어선 '꿀꿀이죽 이웃'이었던 동부이촌동과 서부이촌동에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1967년이었다.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한강변 개발계획'의 하나로 이촌동 앞 한강변을 모래로 메우는 공사를 단행했다. 매립한 땅에는 아파트가 세워졌다. 동부이촌동에 세워진 아파트 단지가 서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컸다. 동부이촌동엔 34개 동 1313가구의 공무원 아파트, 23개 동 700가구의 한강맨션 등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세워진 반면 서부이촌동은 6개 동 494가구의 중산아파트 같은 작은 단지가 전부였다. 음씨는 "뒤돌아보면 그때 두 동네 운명이 갈렸다"라고 했다.

"서울시가 아파트 지으려고 '하꼬방' 사람들을 엄청나게 내쫓았지. 서부는 조그맣게 개발하고 동부는 대단지로 개발하니까, 동부에서 쫓겨난 하꼬방 사람들이 전부 서부로 밀려들어온 거지. 저긴 아주 호화롭게 됐고, 여긴 발전이 멈췄어." 서부이촌동에 작은 단지가 들어선 이유는 단순했다. 땅 면적(120만㎡)이 동부이촌동(280만㎡)보다 작은 데다, 철도청 시설까지 있어 쓸 수 있는 땅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동부이촌동이 개발돼 아파트 단지가 쭉쭉 올라가는 동안 서부이촌동은 판자촌만 넓어졌다. 판자촌 사람들은 무리지어 다니며 아파트 주민들에게 술값을 달라고 행패를 부렸고, 밤에는 그들끼리 싸움도 잦았다. "동부이촌동은 공무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별동네가 됐지. 여기에 공무원 아파트가 생겼으면 좋았을 텐데, 동네가 작아서 아쉽지…."

◇2007년: 한강 르네상스 낭보…"로또 맞았다"

이후로도 서부이촌동은 단지별 소규모 재건축이 이뤄졌을 뿐, 대단위 지역개발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 사이 동부이촌동엔 공장 부지가 정리되고 최고 25층인 GS한강자이 등 고급아파트가 계속 들어섰다. 2000년대, 서부이촌동만큼 낙후됐던 용산 철길 북쪽의 한강로 3가가 개발돼 크게 성장할 때도 서부이촌동엔 개발 소식이 없었다. 현재 도곡동 타워팰리스보다 비싼 값에 거래되는 용산의 시티파크가 2003년 그곳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음씨는 "정말이지 용산까지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거기는 역전(驛前) 하꼬방촌이었는데 갑자기 개발이 됐지. 집 가진 사람 중에 벼락부자들 많이 나왔어. '근처에 부자 된 사람 많은데, 우리는 왜 개발이 안 되나' 이런 생각 많이 했지. 여긴 계속 구렁텅이 안이었거든."

2007년 8월. '구렁텅이'에 낭보가 날아들었다.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코레일의 용산 철도정비창 개발에 '한강 르네상스'를 연계하면서 개발 계획에 서부이촌동을 포함한 것이다. 개발 계획엔 '용산 국제업무지구 개발사업'이란 이름이 붙었다. 언론에서는 '단군 이래 최대 개발 사업'이라고 했다. 온 동네가 들썩였다. "아이고, 그때 분위기 진짜 좋았어. (집값이) 한 주 사이에 억씩 올랐지. 외지인들도 엄청 들어와서 작은 평수 땅이라도 사려고 난리였어. 집값 땅값이 몇배씩 뛰니까 진짜 우리도 잘살아보는가 보다…그리 생각했지."

이후 서울시는 입주대책 기준일(보상 기준일)이 2007년 8월 30일이라는 이른바 '830조치'를 발표했다. 이 시점 이전에 토지 및 주택을 취득한 사람에 대해서만 개발 후 새 건물 입주권을 주겠단 공표였다. 음씨는 서부이촌동이 '830조치' 이후에도 여전히 활기차게 돌아갔다고 기억했다. "집만 못 판다고 했지 개발이 끝나면 20억원씩 준다고 했으니까. 금세 끝날 줄 알았지. 한 일이년 걸리겠지 싶었어."

2007년 12월에는 삼성물산 컨소시엄이 개발사업자로 선정되면서 분위기가 정점에 올랐다. 삼성은 111층 높이의 랜드마크 타워와 쇼핑몰·호텔·백화점·아파트 등을 짓겠다는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했다. 음씨는 "서부이촌동 사람들 표정이 다들 엄청 밝았다"고 회상했다.

"동부이촌동처럼 '이빠이'(크게) 돈 된다고 했지. 땅 4평에 건물 17평 되는 사람들 집이 2억 조금 넘고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 자고 일어나면 억억 그랬지. 그게 8억까지도 팔렸어. 분위기가 얼마나 좋았냐 하면 '로또 맞았다'가 인사였어. 나도 '그지(거지) 생활하다가 모처럼 노후에 편해지겠다' 들떴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달콤한 꿈이 '쥐약'으로

서부이촌동 중산시범아파트 6동 출입구. 출입문 왼쪽 아래 유리가 빠져 있고, 상단에는 각종 스티커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2008년 지구 반대편 미국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서부이촌동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사업성에 대한 우려가 커졌고 자금난이 불거졌다. 코레일은 자금을 추가 조달하기 위해 삼성물산을 비롯한 건설사들에 프로젝트파이낸스(PF) 보증을 요구했지만 삼성물산은 거절했다. 삼성 측은 2010년 9월 대표 주관사 지위를 반납하면서 발을 뺐다.

음씨는 "일이 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시행사인 드림허브에서는 '다음 달이면 된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쪽(드림허브)에선 일종의 위로비로 나중에 3억원씩을 준다고… 달콤한 소리를 있는 대로 했지. 이제 와 보니 쥐약을 던져준 거야. 그러다 부도가 났지. 일이 이렇게 틀어지니까 다들 마음고생 엄청 했어. 6~7년 동안 된다 안 된다 온탕 냉탕 이렇게 왔다갔다 하면서 속을 썩을 대로 썩었으니 속병들 다 들렸을 거야. 동네 사람들 빚 없는 사람이 없어."

그는 담배를 하나 물었다. "지금 나가서 동네 사람들 얼굴 좀 봐. 죄다 얼굴들이 그늘져 있어. 사람들 표정을 보면 알겠지? 삭막하잖아. 도로에 차도 잘 안 다녀. 또 집들은? 내가 볼 때는 집 무너지는 곳도 나올 거야. 세멘(시멘트)이라도 바르고 그래야 했는데 개발된다고 하니까 수리도 다들 안 했어."

꿈이 산산이 조각난 동네는 인심도 사나워졌다. "옛날에는 남의 집 숟가락, 이웃 생일까지 다 알았거든. 이집저집 모여 다니면서 먹고 그랬다고. 형님 아우 하면서 재미난 동네였는데…이제는 아무도 서로 말을 안 하지."

◇2013년: 꿈은 무너지고… 불어난 건 세금과 빚뿐

마음고생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경제적 타격도 심했다. 음씨는 "'830조치'는 음식점조차 안 되게 하는 '서부이촌동 말살 정책'"이라고 말했다.

"이 동네엔 공터가 꽤 있어서 우편 집중국, 택배 물류 센터, 공장 이런 게 많았어. 그 사람들이 점심 저녁 먹고, 야근하고 술 한잔 먹고 하니 식당들이 잘됐지. 그런 게 200군데가 넘었을 거야. 그런데 개발이 된다고 하니까 다 이사를 갔지. 식당들 다 망했지. 노래방도 절단나고, 식당도 절단나고, 빈 가게가 엄청 많아. 장사 안 되는데 싸게 준다고 해서 사람들이 들어오겠어? 들어올 사람이 없어. 나가면 안 들어오지." 실제로 서부이촌동 상가 건물은 3분의 1 이상이 비어 있었다. 개발 대상지에 있던 코레일, 서울 우편집중국, 대한통운, 한솔 등이 이사를 나가면서 상권은 가라앉았다.

손에 쥔 돈은 없는데 6년 사이 부동산 공시가격은 6배가 뛰었다. 재산세가 함께 올랐다. 음씨는 "세금 내려고 돈 빌려 쓰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했다. "개발된다면서 땅값 집값만 어마어마하게 올랐어. 공시가 올려놓고 재산세를 따박 따박 받아가잖아. 못 팔아먹게 묶어뒀는데 세금은 왜 계속 받아가는 건지…."

시행사인 '드림허브 프로젝트 금융투자회사'가 1차 도산을 맞으면서 볕들 날을 기다리던 서부이촌동 사람들은 희망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음씨는 "준비도 없이 일을 벌인 서울시에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했다.

"우리는 이 동네도 동부이촌동처럼 될 줄 알고 몇십 년을 살았어. 집을 담보로 빚을 얻어 쓰는 바람에 이자를 못 갚아서 집이 경매로 넘어가는 사람들도 많아. 서울시는 단군 이래 가장 큰 사업이라고 하더니 입으로만 사업을 한 게 아닌가. 세금과 이자 내려고 노인네들이 파출부라도 나가고 폐지라도 주워와야 할 판이야."

그는 인터뷰 내내 연신 기침을 계속했지만, 이야기가 끝나자 "담배나 사러 갈란다"며 허름한 동네 수퍼 안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