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서부 글로스터셔의 글로스터(Gloucester)시 중심부엔 1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글로스터대성당이 있다. 영화 '해리포터' 속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실제 촬영지이기도 한 이 성당 중앙에는 한 뼘 반 길이의 투박하고 볼품없는 십자상이 전시돼 있다. 6·25전쟁 당시 글로스터셔 연대 1대대(이하 글로스터 대대)를 이끈 제임스 카니 중령이 중공군 포로로 억류돼 있는 동안 독방에서 직접 깎아 만든 것이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춘계대공세에 맞서 글로스터 대대는 서울의 길목인 파주 설마리에서 중공군 3개 사단에 맞섰다. 652명 대 4만2000명이란 수적 열세에다 외부지원도 끊어지자 여단 사령부는 글로스터 대대에 '불가피하면 투항해도 좋다'고 명령했다. 하지만 이들은 마지막 총알 한 발을 소진할 때까지 적들을 막았다. 우리 군의 원로인 백선엽 장군은 "이들이 사흘간 분전한 덕분에 중공군의 춘계공세는 힘이 빠졌고, 그 틈에 아군은 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벤플리트 당시 미8군사령관도 "현대전에서 단위부대의 용기가 과시된 가장 뛰어난 사례"라며 글로스터 부대를 치하했다.
글로스터시는 이들의 정신을 기리는 '6·25 박물관' 건립 계획을 세웠고, 이 소식을 접한 파주시도 박물관 건립에 성금을 기탁했다. 건립되면 유럽 최초의 6·25박물관이 된다. 지난 12일 파주시청 관계자들과 함께 박물관 건립 예정지인 글로스터셔의 주도 글로스터시를 다녀왔다.
박물관 집행위원회의 로버트 딕슨(69) 이사장은 "설마리 전투는 자유 시민들이 힘을 합치면 압제를 물리칠 수 있다는 도시의 전통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했다.
1642년 찰스1세의 폭정에 맞서 청교도혁명이 일어났다. 영국 서부지역에선 글로스터만이 홀로 혁명을 일으킨 의회파에 가담했다.
찰스1세는 3만 대군을 보내 글로스터를 포위했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글로스터는 전제군주에게 무릎 꿇지 않았다. 겨우 1500명의 병력으로 글로스터를 지켜냈다.
공성(攻城) 26일째, 런던 근교로 의회파가 진군한다는 소식에 다급해진 찰스1세는 결국 글로스터를 포기하고 회군한다.
그는 "1694년 이러한 전통 위에 글로스터셔 연대가 창설됐다"고 설명했다. 지역 단위로 모병을 해 대부분 글로스터셔 출신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1815년 워털루전쟁에서 나폴레옹 군대에 맞섰고, 2차대전 버마(미얀마)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가했었다.
현재 부대 편재가 바뀌어 '라이플스 연대 1대대'로 개칭됐지만, 여전히 글로스터 대대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한다. 이 부대의 제러미 크로스리(34) 소령은 "글로스터셔 지역은 독립적인 성향이 강해 부당한 외압에 굴하지 않는 지역색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글로스터셔에선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국민으로서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가정과 지역사회로부터도 교육받는다"고 했다.
주민들 역시 군에 대한 신뢰와 자부심이 깊다. 지역 주민인 수전 해밀턴(65)씨는 "지역사회는 참전용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한다"며 "도심에서의 군 작전이 제한돼 있는 영국에서 유일하게 '도시를 가로질러 행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부대"라고 설명했다. 글로스터 대대원들의 신념이 어린 제임스 카니 중령의 십자상을 마을의 중심에 자랑스럽게 전시한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
설마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귀환한 병사는 67명에 불과했다. 이날 만난 참전용사 벤 위처스(81)씨 역시 총알도 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결국 중공군에 포로로 잡혀 고초를 겪었었다. 자원입대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우리를 붙잡았던 중공군들도 같은 질문을 했었다"며 "그때 총알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계속 싸워 이겼을 것"이라고 했다. 데이비드 브라운 글로스터 시장은 "전쟁은 반가운 일이 아니지만, 평화는 끔찍한 대가를 치르고 얻어짐을 상기해야 한다"며 "과거를 잊은 국가는 미래가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