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오전 0시 30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로데오거리. 행인이 드물었고 줄지어 늘어선 술집과 식당엔 손님보다 종업원이 많았다. 이 일대는 5,6년 전만 해도 불야성을 이루며 전국의 유흥 문화를 선도하던 곳이었다. 4년 전부터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정모씨는 "개업 초기엔 6개 테이블이 꽉 차는 날이 많았는데 이젠 하루종일 '공 치는' 날까지 있다"며 "다들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새벽 2시쯤 찾은 서울 강남역 일대도 한산한 편이었다. 뒷골목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호객꾼이 '할인' '이벤트'라는 글이 적힌 전단을 들고 따라 붙었다.

예전엔 돈 많아 보이는 손님부터 접근했던 그들이 이젠 몇 안 되는 손님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 '물 좋다'고 알려진 J클럽 앞도 대기줄은커녕 종업원 1~2명만 출입구에 있었다. 손님을 기다리던 한 택시 기사는 "2,3년 전만 해도 밤새 북적대던 곳이 이렇게 바뀔 줄 몰랐다"고 했다.

그러나 서울 광진구 화양동 건국대 부근 유흥가의 상황은 달랐다. 자정이 넘었는데도 골목엔 사람들이 떼 지어 몰려다녔고 불을 훤히 밝힌 식당과 술집에는 손님으로 붐볐다. 한 노점상 주인은 "신림동에서 장사하다 사람이 몰린다고 해서 4개월 전 이리로 왔다"고 했다.

◇마시는 술과 양이 달라졌다

서울의 밤이 달라지고 있다. '부어라 마셔라'하며 새벽까지 노는 모습은 눈에 띄게 줄었다. 즐기는 술은 저렴해지고 알코올 도수는 낮아졌다. 이런 변화로 밤문화를 주도했던 강남권 유흥가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고, 건국대와 홍익대 앞, 이태원 등 강북 일부 지역이 새로운 중심지로 떠올랐다.

지난 1월 20일 오전 0시 30분 강남구 논현동의 O클럽. 2년 전만 해도 이 업소에 들어가려면 30~40m 줄을 서서 30분씩 기다려야 했지만 바로 입장이 가능했다.

파티 플래너인 김모(34)씨는 "값비싼 강남보다는 이태원이나 홍대라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몇 년 사이 저렴하고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강북 클럽으로 젊은 층이 몰리고 있다"고 했다.

압구정동에서 7년째 발렛 주차를 해주는 한 술집 종업원은 "3년 전만 해도 10대 중 9대가 외제차였지만, 요즘은 국산차와 외제차가 절반씩"이라며 "고급차와 비싼 술로 허세 부리던 사람들도 강남에서 많이 사라졌다"고 했다.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에 이어 수년 전부터 '강남스타일'의 중심지로 부상한 신사동 '가로수길' 역시 자정을 넘어서면 행인이 드물었다.

한때 강남 유흥문화를 상징했던 강남의 룸살롱들은 찬바람을 맞고 있다. 1인당 술값 100만원을 호가 하는 최고급 룸살롱인 속칭 '텐프로' 업소는 4,5년 전 20여곳이 성업했으나 현재 3분의 2가 문을 닫았다.

안전행정부 지방세정연감에 따르면 2011년 룸살롱, 나이트클럽, 요정의 재산세 중과건수는 2만8526건으로 2010년 2만9845건에 비해 1319건 감소했다. 1년 새 룸살롱과 나이트클럽 1319개가 폐업했다는 말이다. 20년간 강남에서 룸살롱을 운영했던 박모씨는 "기업 접대비가 줄어들고, 건강을 이유로 도수 높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며 "일부 가격 파괴 업소만 버틸 뿐 룸살롱 호황 시대는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국내 위스키 출고량은 212만2748상자(500mL×18병 기준)로 2011년보다 11.6% 줄어들었는데 이 같은 추세는 4년째 이어지고 있다. '양주 문화'의 퇴조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소주 출고량은 지난해 소폭 상승했다.

◇2·3차 줄고 '홈카페족' 늘어났다

흥미로운 사실은 가정용 맥주 출고량이 업소용 출고량을 넘어섰다는 점이다. 지난해 1월부터 11월까지 국내 맥주 시장을 출고량에 따라 대형마트, 편의점 등으로 납품되는 가정용과 맥주바, 식당 등에 판매되는 업소용으로 나눠보니 가정용으로 공급된 맥주는 8억2874만L로 같은 기간 8억1363L에 그친 업소용을 앞질렀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홈 카페족'이 늘었다는 의미로 술집이 남기는 '가격 거품'을 없애고 가족끼리 한잔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직원 20명을 두고 있는 IT업체 대표 김모(56)씨는 "전엔 회식하면 2차는 필수이고 3차는 선택이었지만, 요즘 직원들에겐 2차를 가자고 하기도 부담스럽다"면서 "1차에서 고기 굽고 소주에 맥주 섞어 마시고 회식을 끝낸다"고 했다.

전반적으로 술자리 시간이 짧아진 건 택시업계 목소리를 들어봐도 알 수 있다. 50대 한 택시기사는 "새벽 손님이 줄어 야간 교대조 매출이 2,3년 전에 비해 30% 이상 줄었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서울의 유흥문화가 바뀌고 있다. 술자리는 간단해지고 저렴한 술이 인기다. 그동안 룸살롱과 클럽 등을 앞세워 밤문화를 주도했던 강남 유흥가는 쇠퇴하고 강북 일부 지역이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28일 자정을 넘긴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왼쪽)와 강북의 건국대 앞 유흥가.

◇밀려나는 강남, 떠오르는 강북

서울의 유흥가가 모두 가라앉고 있는 건 아니다. 강남권과 달리 강북의 이태원과 홍익대·건국대 인근은 오히려 손님이 늘었거나 과거와 비슷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달 2일 오전 2시 용산구 이태원 소방서 앞 4차선 도로는 택시와 승용차로 길이 막힐 정도였다. H호텔 뒤에 있는 G바 입구엔 대기 손님이 10여명 있었고 자리를 잡으려면 1시간은 기다려야 했다.

업소 종업원은 "가격 착하지, 분위기 좋지, 요즘 누가 강남에서 놀아요"라면서 "강남은 임대료나 권리금이 비싸 술값·음식값을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다"고 했다. 지난 연말 이태원 일부 업소는 한 달 전 예약이 끝난 곳도 있었다. 회사원 한모(29)씨는 "클럽의 경우 음악과 분위기는 비슷한데 이태원 쪽이 강남보다 10만원 이상 싸다"고 했다. 2000년대 들어 강북의 데이트 명소로 각광 받았던 홍대 앞 인기는 여전했다. 20대 초반 학생뿐 아니라 30~40대 '넥타이 부대'도 제법 눈에 띄었다.

그러나 같은 강북이라도 대학로 일대와 이화여대 입구 등 한때 잘 나갔던 유흥가는 대중교통이 끊기자 '인적 드문 곳'으로 바뀌었다. 6년 전부터 대학로 인근에 살고 있는 러시아 유학생 빅토르는 "처음 왔을 땐 대학로 양쪽 술집과 식당에 손님이 많았는데 지금 마로니에 방향에는 없어진 술집이 많고 늦은 시간에는 아예 사람이 다니지 않는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우리의 유흥문화가 유럽이나 미국처럼 '차분'해지는 배경엔 경기불황 탓도 있지만 집단주의 문화 퇴조와 웰빙 문화의 확산을 꼽았다.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집단주의와 조직문화 속에 살아온 세대가 줄어들고 개인주의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늘어나면서 유흥문화도 바뀌고 있다"며 "'마시고 죽자'는 식의 음주문화는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