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 기자

몇 년 전에 딸을 데리고 공원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나는 운동을 하고, 당시 아홉 살이던 내 딸 한나는 다른 애들과 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나길래 얼른 뛰어갔다. 웬 할머니가 한나를 꽉 붙든 채, 다섯 살쯤 된 자기 손자더러 "너도 빨리 얘 머리를 돌로 때려주라"고 호령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당신 딸이 내 손자를 밀었으니까, 우리 손자도 갚아줘야 한다"고 흥분했다.

나는 한나에게 얼른 사과하게 했다. 속으로는 꽤 충격을 받았다. 그 할머니가 자기 손자에게 준 가르침은 사실상 "화가 나면 분출하라"였다.

한국 사람이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보기엔, 한국인 상당수가 욱해서 저지르는 행동을 '그러려니' 용납해준다.

영국인은 감정을 다스리고 어떤 경우라도 차분하게 행동하도록 교육받는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냉정을 지키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친다. 이런 가치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詩)가 영국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의 '만약에'이다.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 중 하나다.

'네 곁에 있는 뭇사람이 이성을 잃고 너를 탓할 때/너만은 이성을 지킬 수 있다면(중략)/인생에서 승리할 때나 패배할 때나/이 두 가지를 똑같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중략)/아들아 그때 비로소 너는 남자가 되리라.'

다시 한국 얘기로 돌아오자. 지난해 한국 전통음악 연주자가 나에게 "한국인의 기본 정서는 한(恨)이 아니라 흥"이라고 했다. 동네에서 다 같이 어울려 노는 것이 한국인의 기본 정서라는 주장이다. 이탈리아인·그리스인이 그렇듯 한국인도 천성적으로 열정적이다. 하지만 한이 됐건 흥이 됐건, 둘 다 이성이 아닌 감정이라는 점에선 똑같다. 흥을 강조하는 주장이 내게는 '한국인의 기본 특징은 지성이나 태도가 아니라, 감정에 있다'는 소리로 다가왔다.

물론 감정도 필요하다. 그 점을 십분 인정해도, 전투·경쟁·논쟁·협상처럼 촉박하게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감정은 저주일 뿐 축복이 못 된다.

문제는 한국인이 욱하도록 부추기는 나쁜 롤모델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 배우들이 수시로 화산처럼 폭발한다.

앤드루 새먼은 영국인으로, 켄트대와 런던대를 졸업하고 15년째 한국에서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다.

현실세계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엘리트마저 욱한다. 대기업 총수가 욱해서 자기를 화나게 한 사람들을 잡아다 때려준다. 그들의 자녀는 욱해서 호텔 방 기물을 때려 부순다. 국회의원이 열 받는다고 국회에서 몸싸움을 불사한다. 이런 짓을 저질러도 제대로 처벌받는 사람이 없다. 국민들에겐 이런 메시지로 다가온다. '분노를 컨트롤하지 못해도 괜찮다.'

이런 현상이 생긴 이유는 부분적으로 '자유방임적 양육'에 있다. 옛날 한국인은 대가족 안에서 엄격하게 자랐다. 핵가족이 늘면서, 한국인은 점차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고 있다.

한국 전통문화에는 탈춤·굿처럼 열정을 강조하는 것도 있고, 참선·서예·무예처럼 냉정을 길러주는 것도 있다. 열정과 냉정이 균형을 이루던 시절의 한국인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6·25 해외 참전용사를 인터뷰했다. 그들이 본 1950년대의 한국은 삶이 끔찍하게 고단한 나라였다. 그래도 한국인은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노병들은 그런 모습에 감탄했다.

그런 균형이 무너진 오늘날, 한국인은 '감정 절제'보다 '감정 무절제'에 기울어 있다.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감정 절제를 가르쳐야 욱해서 일으키는 사회문제가 줄어든다. 학교 안에 감정 조절 교실을 연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바뀌지 않으면 앞으로도 학부모와 교사들이 욱하는 아이들 때문에 쩔쩔매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