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11월 아프리카 대서양 연안 그란카나리아제도(스페인령)에 '강화1호'가 입항했다. 정부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빌린 자금으로 마련한 그 배엔 '대서양 드림'을 꿈꾸는 젊은 한국인 선원 40여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이 발을 디딘 곳은 그란카나리아 제1의 항구도시 라스팔마스였다. 인구 30만명인 그곳은 1970년대 한때 한인 1만5000명의 생사고락 현장이었고 그들이 보내온 돈은 조국 산업화의 밑거름이 됐다. 지난 1월 26일부터 3주간 본지와 TV조선 '봄날' 제작팀이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연구원들과 함께 현지를 다녀왔다.
◇가난한 조국에 1조원을 안겨주다
파독광부처럼 경제개발 초석… 1966년 어업기지 건설 후 일본이 남긴 중고배 사 조업
스페인 어선 그물 5번 칠 때 우린 8번 칠 정도로 부지런…외국 어선들 한국 선원 탐내
지난 2일 오후 라스팔마스 라루스 부두 인근의 찻집에서 만난 금웅수산 방성웅(58) 상무. 통영수산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스물셋에 3등항해사로 원양어선에 몸을 실은 그는 35년을 라스팔마스에서 보냈다. "죽을 고비 숱하게 넘겼고 큰돈도 만져봤지요. 그간 겪은 일이요? 아…."
라스팔마스에 한국수산개발공사의 원양어업 전진기지가 세워진 건 1966년이었다. 북태평양 어장에서 돈을 만진 우리 정부는 추가 어장이 필요했고 라스팔마스에 기지를 설치해 대서양 공략에 나섰다. 당시 한국 총수출액이 2억5030만달러였는데 그중 수산물 수출이 4200만달러로 전체의 17%였다. 2011년 우리 수출에서 반도체(9%)와 자동차(8%)가 차지하는 비중이 17%인 점을 감안하면 1960년대 수산업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어선 한 척 마련하기 빠듯했던 우리 정부는 한·일 청구권 자금과 프랑스·이탈리아 차관으로 배를 구입해 수산업 분야를 강화했다.
당시 라스팔마스엔 이미 10여년 전부터 진출해 있던 일본 선단들이 선원 임금 상승으로 철수를 시작했는데, 한국 선사들은 일본이 남긴 중고 배를 주로 사들여 조업에 나서게 됐다. 방 상무는 "일본인들은 배를 팔면서 고급 어종은 반드시 일본에 넘겨야 하는 일종의 '노예계약'을 맺었다"면서 "돈 없는 약소국 입장에선 그 조건을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인의 개척정신은 대서양에서도 빛을 발했다. 오랜 기간 선장 생활을 했던 남상태 서해수산 대표는 "어디에 문어가 있는지, 갑오징어가 있는지를 귀신같이 알아냈고 밥 먹듯 밤샘 조업을 했다"면서 "다른 나라 어선은 우리와 어획량이 상대가 되지 않아 주변국에서 한국 선원을 부러워하고 탐냈다"고 했다. 스페인 어선이 그물을 5번 놓을 동안 우리 어선은 8번을 놓을 정도였다. 우리 선단들의 주된 조업 무대는 세네갈, 기니, 기니비사우, 시에라리온 등 중서부 아프리카 연안이었는데 베테랑 선장들은 수천㎞에 이르는 어장에 대해 언제 어디 가면 무슨 고기가 잡히는지 손금 보듯 훤했다고 한다.
라스팔마스에서 벌어들이는 달러는 갈수록 불어났다. 조업 첫해인 1966년 252만 달러어치의 물고기를 수출했고 10년 만인 1976년엔 4500만달러어치를 수출했다. 진출 20년 만인 1987년 한 해에만 1억1000만 달러의 외화를 벌었다. 비슷한 시기 독일에 파견됐던 간호사·광부 1만9000명이 15년간 송금한 금액과 같은 규모다. 라스팔마스 선단들은 한국이 본격 성장에 들어서기 직전인 1987년까지 21년간 모두 8억7000만달러(1조원)를 벌어 한국에 보냈다.
대서양에 가면 돈을 번다는 소문이 나자 당시 선원 채용엔 지원자가 줄을 이었다. 38년 전 라스팔마스에 온 박덕 ㈜서경 대표는 "대졸·고졸 고학력자는 물론 장교, 회사원까지 라스팔마스에 왔다"면서 "일부 지원자는 국회의원 '빽'까지 써가며 선원이 되려 했다"고 말했다. 당시 일반 선원들은 2년 6개월 근무하는 조건이었는데 귀국할 때면 부산에 집 두 채 마련할 돈을 손에 쥐었다. 선원들은 현지 구입한 TV 등 가전제품은 물론 배에서 쓰던 화장지와 에프킬라 등 소모품까지 챙겨두었다가 집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라스팔마스 전진기지는 1970년대 후반 전성기를 맞이했다. 원양어선 210척에 선원 1만여명과 교민 5000명 등 1만5000여명이 라스팔마스를 무대로 활동했다. 라스팔마스 총영사관의 임태훈 수산관은 "배 한 척당 30개월 조업하고 450만달러를 벌었다"면서 "2년만 조업하면 배값을 뽑았다"고 했다.
◇목숨을 담보한 외화벌이
선원 124명 희생, 한번 나가면 3개월 선상생활
관 만한 공간서 새우잠 자고 바닷물로 세수·양치질 일쑤… 다른 나라 영해 잘못 넘었다 경비대에 맞고 쫓기기도
그러나 이들이 벌어들인 달러는 목숨을 담보한 대가였다. 지난 1일 오전 11시 산라사로 공동묘지 한쪽에 세워진 한인 위령탑. 지난 47년간 대서양 인근 해역에서 조업하다 숨진 선원 124명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다. 위령탑 전면엔 시인 박목월이 1978년 남긴 헌사가 있었다. "오대양을 누비며 새 어장을 개척하고 겨레의 풍요한 내일을 위하여 헌신하던 꽃다운 젊은이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허망함이여 그들은 땅끝 망망대해 푸른 파도 속에 자취없이 사라져 갔지만 우리는 그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줄기차게 전진하는 조국근대화와 겨레의 번영 속에 그들의 숭고한 얼과 의지는 살아 있으며…."
1979년 8월 태창수산 소속 '81태창호'는 세네갈 수역에서 한밤중에 문어와 돔을 잡다 4만t급 상선과 부딪쳤다. 선원 30명이 죽고 2명이 가까스로 구조됐다. 이런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방성웅 상무는 "한번은 대학 동기가 바다로 튕겨나가 부표를 잡고 버텼지만 풍랑이 너무 거세 손을 써볼 수가 없었다"면서 "졸다간 언제 죽을지 모를 만큼 선상 생활은 쉽지 않았다"고 했다. 한번 조업 나가면 바다 위에서 2·3개월 머무는데 식수가 부족해 양치질과 세수는 바닷물로 했고 먹구름이 몰려오면 하이타이를 준비했다가 짧은 소낙비에 몸을 씻었다. 적도 부근에서 활동하지만 선실엔 에어컨·선풍기는 없고 발도 펴지 못하는 길이 150㎝ 너비 50㎝ 작은 관만 한 개인 공간에서 새우잠을 청했다.
고기 떼를 따라 남의 나라 영해로 들어갔다가 경비정에 나포되면 생사 파악조차 힘들었다고 한다. 장금윤 인터불고 기지장은 "당시 아프리카 국가 해안경비대는 법이 없었다. 배에 오르자마자 소총 개머리판으로 선원들을 후려 갈겼다"면서 "안 잡히려고 도망가면 기관포를 난사하면서 쫓아왔다"고 했다. 체포되면 최소한 물게 되는 벌금 20만달러를 아끼려는 목숨 건 도주였다.
◇한시도 조국을 잊지 않은 한인사회
우린 조국을 잊지 않았노라
본국에 재난땐 성금 걷고 88올림픽 등 물심양면 후원
사하라 파견 국군장병 위해 철마다 김치·된장 챙겨보내
라스팔마스 한인들은 현지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라스팔마스주(州) 공보관인 마눌로씨는 "한인들의 근면함과 도전 정신은 큰 감명을 줬다"면서 "이들은 한국에도 많은 돈을 벌어줬지만 라스팔마스 경제에 큰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
1977년 대통령 하사금으로 라스팔마스에 선원회관이 만들어지면서 발족한 한인회는 교민의 구심점이 됐다. 한인회는 풍어제와 사물놀이, 야구·낚시·골프·바둑 동호회, 체육대회 등 각종 행사를 통해 교민을 하나로 묶었다. 본국에 재난이 닥치면 곧바로 성금을 조성했고 88올림픽 등 국가 경사에는 후원회를 결성했다. 버마 폭탄 테러와 KAL기 피격 등 국가적 위기 땐 가두시위를 했고 위령제를 지냈다. 이선호 한인회장은 "밖에서 살면 모두 애국자가 되는 것 아니냐"면서 "우리는 단 한 순간도 모국을 잊는 적이 없다"고 했다. 라스팔마스를 먼저 거쳐 간 일본인들도 위령탑과 기념비를 만들지 않았지만 한인회는 현지에 '한국광장'을 조성할 정도였다. 1990년대 유엔 평화유지군 활동차 서부 사하라에 파견된 국군의료지원단 장병들에게 철마다 김치와 고추장, 된장을 챙겨준 이들도 바로 라스팔마스 한인들이었다. 라스팔마스 어머니회는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선원들의 자식을 돌봤고, 한인 2세와 현지인을 위해 장학금을 모았다.
한국체육관 방경원 관장은 현지 스페인 경찰관의 '사부'로 통했다. 그는 공무원 등 현지인 3000명에게 태권도를 전수했고 매년 태권도·합기도 시범대회를 열고 있다.
이들 덕택에 현지엔 한류(韓流)가 거세다. 한국 미용실 3곳이 성업 중이고 10여개 한국 식당은 현지인에게 인기를 누리고 있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박기완(35)씨는 "한인 고객이 절반 스페인 현지인 고객이 절반"이라고 했다.
◇쇠락의 길을 걷는 라스팔마스
쇠락하는 원양어업
中, 자금력·외교력 앞세워 아프리카 어장 빠르게 잠식
日, 50년만에 컴백하는데 한인은 1200명으로 급감
그러나 라스팔마스 한인 사회를 지탱해온 원양산업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1980년대 후반 들어 아프리카 연안국들이 영해를 확대하고 다른 나라 조업을 규제하면서 한때 210척에 달했던 한국 선단은 현재 50여척으로 쪼그라들었다. 한국 배의 선원 역시 중국·베트남·아프리카인들로 교체됐다. 선사 주재원이나 선박 수리 등 대부분 수산 관련 산업으로 생계를 이어온 현지 교민도 계속 줄어 지금은 1200명이 남아 있다.
특히 최근 우리 선단은 중국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외교력과 자금력을 앞세운 중국은 한국이 활동해 오던 아프리카 연안 어장을 빠른 속도로 잠식하고 있다. 최근 수년간 후진타오·시진핑·보시라이 등 중국 지도부가 잇달아 라스팔마스를 찾았을 정도다. 김태정 ㈜해정 대표는 "중국 어선은 불법 조업을 하다 아프리카 연안 경비대에 나포돼도 곧바로 풀려난다"고 했다. 반면 한국은 30년 전인 1983년 전두환 대통령이 해외순방 도중 잠시 들렀을 뿐이다.여기에 50년 전 빠져나간 일본 선단이 본국 불황으로 다시 되돌아오면서 라스팔마스에선 때 아닌 한·중·일 삼국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점수 총영사는 "아프리카 연안국의 수산 자원화 움직임과 중국의 견제로 한국의 원양 산업이 더 위축되고 있다"면서 "그렇다고 아프리카 진출 교두보이자 대서양 개척 기지인 라스팔마스를 절대 포기해서도 안된다"고 했다. "우리 과거를 자랑하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대서양에도 조국에 기여한 한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최은혜 라스팔마스 어머니회 회장의 말이었다.
3월7일 오후 8시50분 TV조선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