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담장 너머로 뻗은 나무, 가지에 푸른 열매처럼, 귀한 축복이 삶에 가득히 넘쳐날 꺼야. 너는 어떤 시련이 와도 능히 이겨낼 강한 팔이 있어…."
개신교 신자라면 누구나 한두번은 듣고 불러봤을 노래 '야곱의 축복'. 이 노래를 편곡하고 프로듀싱한 이기현(31) 음악감독은 앞을 전혀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다. 구약성경에서 야곱은 하나님이 그의 넓적다리뼈를 부러뜨려 쓰러지게 한 뒤에야 한 민족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허락받는다. 20일 서울 서교동 작업실에서 만난 그에게 물었다. "앞을 못 보는 것은 당신에게 축복인가?" 그는 주저 없이 "네"라고 답했다. "보통 한 달이면 두세번쯤 교회나 집회에 찬양 사역을 나가요. 제 연주와 노래를 들은 비장애인 교인들은 '당신이 받은 것을 나눠달라'고 해요. 저는 앞도 못 보는데 말이죠. 그런 순간순간 저를 인도하는 분이 계신 걸 느껴왔습니다."
◇기도원서 뜬 '음악의 눈'
소리엘, 다윗과 요나단, 한스밴드, 강찬, 주리…. 이 감독은 많은 유명 CCM 가수의 노래를 작·편곡하고 프로듀싱한, 이 분야 실력자다. 건반, 기타, 베이스, 드럼, 트롬본, 꽹과리, 장구까지 혼자 악기 10여종을 다룬다. CCM·대중가요 뮤지션 5팀이 소속된 '엠피아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프로듀서를 2008년부터 맡고 있다. 지금까지 새로 작곡하거나 편곡한 가스펠송만 500여곡.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계의 대표적 작·편곡자 겸 프로듀서로 꼽힌다. "일일이 헤아려 본 적은 없지만, CCM 앨범 전체의 편곡과 프로듀싱을 맡은 게 50여장, 일부에만 참여한 건 100여장쯤 될 거예요." 이 감독은 "대중가요도 편곡·프로듀싱하지만, 특별히 가스펠을 만들 땐 예배 드리는 마음이 된다"며 "찬양 사역을 할 때도, 연주를 할 때도 늘 내 음악이 온전한 예배가 되길 기도한다"고 했다.
이 감독은 세상을 본 기억이 없다.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는데, 병원의 산소 압력 조절 실수로 시신경이 끊겼다.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그가 8살 때 마지막 희망을 붙드는 심정으로 기도원에 데리고 들어가 아홉 달을 지냈다. 그곳에서 처음 음악에 눈을 떴다. "피아노 소리가 신기했어요. 반주자 전도사님께 한번 쳐보고 싶다고 했죠. 처음엔 화음 3개를 알려주시더군요. 쭉 듣고 따라쳤더니 석 달 만에 예배 반주를 하게 됐어요."
이후 그에게 음악은 삶의 전부가 됐다. 처음엔 기타도 눕혀 놓고 음을 짚어가며 가야금 뜯듯 줄을 뜯었다. 그런 식으로 모든 악기를 거의 혼자 힘으로 배웠다.
◇"안마사가 아니라 음악가입니다"
낙천적 성격이지만, 청소년기에도 그랬던 건 아니다. 안마사 취업을 거부하고 음악 고집을 꺾지 않아 맹학교 선생님과 충돌도 했다. "그땐 하나님을 많이 원망했어요. 왜 내가 앞을 못 보게 하셨나요, 왜 안마사밖에 못 한다는 겁니까, 그런 원망."
가까스로 고교 과정을 마치고, 프리랜서 세션으로 뛰며 조금씩 실력을 인정받았다. 실용음악학원에서 비(非)장애인들에게 앙상블(합주)도 가르쳤다. 그는 "하늘에 계신 분께 음악을 배웠다"고 말한다.
이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찬송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특히 '내가 눈멀었으나 지금은 앞을 보네(I was blind but now I see)'라는 부분을 가장 좋아한다. 그는 음악가로서의 꿈에 대해서도 말했다. "'날 수 있다는 걸 난 믿어요(I believe I can fly)'나 '날 세우시네(You raise me up)'처럼, 비기독인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음악을 만드는 연주자·프로듀서가 되고 싶어요. 마음은 늘 화해와 사랑을 말했던 스티비 원더처럼 평화롭고, 음악은 굴곡진 인생을 살았던 레이 찰스처럼 찐~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