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세계서 열연 펼친 배우 최민식

"영화에서 시멘트 냄새가 나길 바랐다. 완공 안 된 건물에 들어가서 날리는 먼지를 온몸으로 맞는 느낌이랄까. 다행히 우리가 의도한대로 영화에서 시멘트의 질감이 만져졌다."

'신세계'는 최대 깡패조직 '골드문'의 회장(이경영)이 갑자기 사망, 후계자 자리에 공백이 생기면서 시작한다. 신입 경찰관 시절 '강 과장'에게 스카우트돼 8년 동안 경찰신분을 숨긴 채 조직원으로 산 '이자성'(이정재)이 강 과장과 그룹 후계자로 꼽히는 '정청'(황정민)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야기다. 남자들의 의리와 배신을 거칠게 그렸다.

최민식(51)은 위장 잠입수사 작전의 판을 짜 8년 전 이자성을 골드문에 잠입시킨 경찰청 수사기획과 '강 과장'을 연기했다. 골드문 후계자 결정에 개입, 조직을 경찰의 손아귀 안에 넣으려는 신세계 작전을 설계한다.

분칠하지 않은 얼굴, 신경쓰지 않은 듯한 고동색 상하의를 입고 "어제 먹은 술이 안 깨요"라고 큰소리로 웃는 호탕함은 극중에 없다. 온갖 빵이 담긴 봉지를 권하는 친절함도 영화에서는 볼 수 없다. 목표를 위해서 부하인 자성에게도 음모와 협박을 서슴지 않는 최민식의 냉철함과 잔혹함은 '부당거래', '악마를 보았다'의 각본을 쓴 박훈정 감독이 연출을 맡으며 더욱 뚜렷해졌다. 최민식은 박 감독에 대해 "'악마를 보았다' 때 작가와 배우로 만나 친하게 지냈다. 인연이 되려고 하니 박 감독 작품에 다 출연한다. 이 친구가 굉장히 골 때리는 캐릭터다. 의대를 다니다가 때려 치우고 개고생하러 이 바닥에 들어왔다. 왜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저도 잘 모르겠어요'라고 답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글을 보니 매우 좋다. 간단명료하다. 세련되지 않지만 글로 할 말은 한다. 또 배우들에게 예의를 차리며 아양을 떠는 법도 없다. 그야말로 곤조와 꼴통 기질이 다분한 감독"이라고 평했다.

"박 감독이 '혈투'(2010)로 크게 실패했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는 거다. 시나리오만 써서 몰랐는데 연출 마인드가 있는 친구다. 글을 쓰고 직접 연출을 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심하게 말아먹었지만 그거 하나로 인해 평가받는 게 억울하게 느껴졌다. 또 본인이 (신세계를) 쓴 만큼 제일 잘 알 것 같아서 출연하게 됐다."

"저는 자선사업가가 아니에요. 박 감독이 괜찮은 친구고, 저도 얻을 게 있으니 출연했겠죠. 똑똑하고 감각 있는 친구와의 작업이 기대가 되기도 했어요. 타성에 젖지 않은 날것 같은…. 괜찮잖아요? 제가 모르고 있는 것을 그 친구의 글을 통해서 느낄 수도 있고요. 서로 윈윈하기 위한 선택이었죠."

잠시 생각에 잠긴 최민식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 바닥의 짬밥은 중요하지 않다. 돈을 대는 투자자의 입장에서야 검증된 감독을 쓰고 싶겠지만 모험도 해야 한다. 창작이라는 게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지 어떻게 매번 성공을 하느냐. 실패하는 것도 봐줘야 한다. 박 감독이 영화계에서 사장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신세계' 출연을 가장 먼저 결정한 이유다. '정청'을 두고 재다가 '강 과장'을 선택했다. "정청을 하면 목을 썰어야 하잖아요. 싫어요. 또 '악마를 보았다'와 이미지가 겹쳐서 결국 '이 영화에서는 양복입고 써네'라는 소리밖에 못 들었을 거예요"라며 손사래를 쳤다. 황정민(43)에게 '정청'을 양보하고 이정재(40)를 기다렸다.

"'같이 놀자'가 취지였다. 좋은 출연진과 함께 해서 웰메이드 영화를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자성'이 캐스팅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민이가 먼저 캐스팅됐다. 그날 전화해서 '우리 둘이서 나는 레프트윙, 너는 라이트윙을 맡자'고 말했다"고 전했다.

"누가 누구의 밑으로 들어간다는 개념은 버려야 해요. 그건 기획사들이 굉장히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다 주인공만 하려고 하고. 좋은 영화에 좋은 배역, 좋은 작품이라면 본인의 존재감이 떨어진다고 해서 자신의 가치가 평가절하되지 않거든요. 또 자신보다 낮은 급으로 비쳐지는 배우보다 먼저 현장에 오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어요. 그 따위 생각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주요 배역일수록 현장에 빨리 나와서 익히고 배워야죠"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최민식은 '신세계'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류승룡(43)과 함께 '명랑-회오리 바다'(감독 김한민) 촬영에 나섰다. "그 분(이순신)을 연기하는 게 운명처럼 느껴졌다. 배우생활을 하고 이렇게 기를 빼앗기는 게 처음이다. 내가 그분의 희로애락을 감히 표현하고 싶어졌다"고 고백했다.

또 영화다. 1997년 드라마 '사랑과 이별' 이후 줄곧 영화만 고집하고 있다. 앞으로도 "굶어 죽지 않는 한 영화의 길 만을 갈 것이다"고 선언했다.

"드라마는 소재의 제한이 있어요. '신세계'같은 작품은 드라마에서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해요. 하다못해 욕도 못하고 조금만 과하면 '방송 불가' 판정이 나와요. 그러다보니 상상력에 제한이 오죠. 영화도 관객과의 소통이지만 기본적인 건 제가 만족해야죠. 저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이 직업을 선택한 거예요."

최민식은 "옛날에 드라마 했을 때 PD들이 이제는 데스크가 됐다. 직접 전화도 해주고 방송하자고 권하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며 웃었다. "일부는 '영화로 가더니 방송을 낮게 보는 것 아니냐'고 오해를 하죠. 단지 소재의 제한, 감정이 안 잡히고 연기가 부자연스러워도 접지 못하는 드라마 촬영 환경이 자신 없을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