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전북 전주에서 연탄불을 피워 형과 부모 등 일가족을 살해한 범인은 범행에 '수면제'를 활용했다. 작년 12월 보험금을 노려 50대 남성을 살해한 뒤 지문을 도려낸 일당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엽기·잔혹 범죄에 '수면제'가 등장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수면제를 이용해 살인·성폭행·강도 등을 저질러 언론에 보도된 사건만 지난해부터 20건이 넘는다.
수면제는 어떻게 처방·판매되고 있을까. 본지 취재팀이 6일 2시간여 동안 2개 팀으로 나눠 서울 종로구와 성북구, 동대문구 일대의 병원 11곳을 돌아봤다. 그 결과 병원 8곳에서 수면제를 처방해줘 총 91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날 오전 11시,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의 한 신경과의원. 잠이 잘 안 와서 찾아왔으니 수면제를 처방해 달라는 기자에게 의사는 "효과가 없으면 다시 오라"며 14알을 처방해 줬다. 약 250m 떨어진 한 의원에서의 두 번째 처방은 더 수월했다. "잠을 잘 못 잡니다"라는 기자의 말에 의사는 곧바로 "졸피뎀 줄게요"라며 10알을 처방했다. 약 50m 거리의 또 다른 의원에서도 "대학생들이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로 자주 찾는다"며 7알을 중복 처방해줬다. 약 40분 동안 300여m 거리 내에 있는 병원 3곳에서, 총 31알의 수면제가 확보됐다.
다른 기자는 오후 2시, 종로구 명륜1가의 한 내과를 찾았다. 의사는 "어디가 아프죠?" "수면제 줘요?"라며 두 마디로 진료를 끝내고, 20알을 처방해 줬다. "부족하면 또 오라"는 말도 덧붙였다. 잇따라 찾은 성북구 동선동의 한 내과와 의원에서는 5분간의 진료 끝에 각각 20알과 7알을 중복 처방받았다. 47알의 수면제를 확보하는 데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수면제 중복 처방은 금지돼 있다. 자칫 과도한 처방으로 자살에 사용되는 등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지난 2010년부터 150억여원을 들여 '의약품안심서비스(DUR)' 시스템을 구축·운영해 왔다. 중복 처방을 막기 위해 병원과 약국이 환자들의 투약정보를 실시간 공유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서비스는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활용해야만 한다는 '강제성'도 없고, 이를 어겼을 때 처벌할 규정도 없기 때문이다. 심평원 관계자는 "의약품안심서비스를 구축하는 것은 의무지만, '입력과 확인'은 의무가 아니라 이를 활용치 않는 병원이나 약국이 많다"며 "투약정보를 제때 입력치 않을 경우 중복 처방이 가능해진다"고 전했다. 지난 18대 국회엔 이를 의무사항으로 격상하는 법안이 발의됐지만, 결국 폐기됐다. 19대 국회에도 동일 법안이 발의됐지만, 아직 통과되진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