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할머니는 어떻게 저렇게 잘나가냐?” 요즘 새누리당 김을동 의원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지난해 김 의원은 ‘민주당의 텃밭’으로 통했던 송파 병에서 재선에 성공했고, 단번에 세 명의 손자를 얻었다. 김을동 의원은 최고의 시절을 보내며 “모든 것이 다 조상의 은혜”라고 공을 돌린다.
김을동 의원은 요즘 한창 바쁘다. 국회의원들에게는 열두 달 중 1월이 그나마 여유로운 달이련만, 오히려 다른 때보다 더 분주하다. 그동안 미뤄왔던 지역 행사에 참여하거나 2월에 있을 임시국회를 준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작 바쁜 이유는 따로 있다. 이제 3월이면 돌이 되는 세 손자들이다.
"사내 녀석들이 보통이 아니에요. 성장 속도가 보통 아이들에 비해 빠르다고 해요. 2㎏ 저체중으로 태어났지만, 건강하게 자라줬어요. 이제는 세 녀석 모두 살이 올라 할머니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어쩌면 좋아요.(웃음)"
세 배 기쁨 안겨다준 세쌍둥이
김 의원은 세쌍둥이를 통해 한 번에 세 배의 기쁨을 느낀다. 할머니가 문에 들어서면 세쌍둥이는 각자의 보행기를 타고 쌩쌩 달려와 반긴다. 또 한 날 한 시에 태어났지만 각기 다른 성격과 외모를 가진 아이를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첫 째는 아빠를, 셋째는 엄마를, 둘째는 두 사람을 섞어놓은 얼굴이라고.
“세쌍둥이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 첫째는 이래서 예쁘고, 둘째는 저래서 예쁘고, 셋째는 전부 예쁘고…. 저를 보고 벙글 벙글 웃는 것도 행복하고, 사람 사는 재미가 있어요.”
그러나 남자 아이 세 명을 한꺼번에 키운다는 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더구나 이제 서서히 뭔가를 짚고 걸음마를 시작하는 단계라 위험은 배로 늘어났다. 매일 상상 그 이상의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이 펼쳐진다.
“잠시라도 아이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어요. 셋을 한데 모아 둘 수 없을 정도로 장난이 심하고, 아이를 어렵게 재워도 한 아이가 깨서 울면 전부 깨서 울곤 하죠. 아주머니 두 분과 같이 돌보는데도 힘에 부칠 정도예요.”
아이를 키우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분유와 기저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동이 난다. “돈도 엄청 들어가요. 기저귀만 해도 세 배잖아요. 하루에 기저귀 큰 거 한 통 다 쓰니 말 다했죠. 선물하는 사람들도 부담이에요. ‘이 집은 뭐든 세 개를 사줘야 한다’고들 하죠.”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일까지 기다리는 일 또한 어려웠다. 산모의 건강이 가장 걱정이었다. 송일국은 방송에 출연해 “산모가 당하는 고통은 상상초월이었다. 의사선생님도 너무 걱정하시며 한 아이를 포기하는 것까지 고려해보라고 하셨다.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며 힘들었던 상황을 털어놓은 바 있다.
“며느리를 옆에서 보면서 ‘인간의 배가 이 정도까지 늘어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아이들이 배 속에서 하루 더 있는 게 밖에서 일주일 몫을 한다고 해요. 며느리가 더 이상 못 참을 때까지 견디는데, 어머니라는 존재가 얼마나 위대한지 느꼈죠.”
9개월 만에 세상에 나온 세쌍둥이의 이름은 알려졌다시피 ‘대한’, ‘민국’, ‘만세’다. 김을동이 직접 지은 태명이었는데, 진짜 이름이 됐다.
“세쌍둥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제가 대한, 민국, 만세로 태명을 지었어요. 태명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고, 아들 내외도 맘에 들어 해서 진짜 이름이 됐죠. 얼마 전 일국이가 독도까지 헤엄쳐가는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잖아요. 그로 인해 일본 쪽에서는 말이 많았고요. 그때 일국이가 트위터에 이런 말을 남겼더군요. ‘그냥 내 세 아들 이름이나 불러봅니다. 대한, 민국, 만세!’”
며느리의 지지로, ‘광개토여왕’ 되다!
김 의원 입장에서도 세쌍둥이는 '대한민국 만세!'였다. 놀랍게도 아이들이 태어난 2012년 3월 16일, 김 의원은 새누리당 송파 병 지역구에서 공천을 받았다.
"세쌍둥이가 행운을 가져다준 것 같아요. 어딜 가나 저를 '세쌍둥이 할머니', '재수 좋은 할머니'로 반겨주셨어요. 쌍둥이는 많아도 세쌍둥이는 신문에 날 정도로 기적에 가까운 확률로 태어나니까요."
18대 총선에서 친박연대 비례대표로 당선된 바 있는 김을동 의원은 이번 19대 총선을 통해 재선에 성공했다. 지난 선거는 "재선에 성공했다"는 상투적인 말로 정리하기에는 아쉬울 정도로 드라마틱했다.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지만, 아직 여성이 정치를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어요. 지역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는 더 힘들죠. 한창 새누리당이 위기였을 때 총선을 앞두고 서울은 전멸을 하겠다는 의견이 있었죠. 그런 상황에서 ‘어차피 안 될 거, 장렬하게 전사하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장렬히 전사할 곳을 찾았는데, 구로와 송파 병 두 지역이 20여 년 동안 민주당 텃밭이더라고요. 송파 갑·을과 달리 병은 한 번도 새누리당이 당선된 역사가 없었죠.”
‘사즉생 생즉사’의 심정으로 김 의원은 송파 병 쪽에 마음을 정했다. 결과가 불을 보듯 뻔하다는 이유로 보좌관을 비롯한 모두가 김 의원의 선택을 말렸다. 그러나 김 의원은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 정신으로 간다! 당선되면 새누리당의 일등 공신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모험을 시작했다.
“송파 병 지역을 방문했는데, 서민적이고 훈훈한 느낌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 ‘이 지역이 나와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시장에 갔더니 저와 비슷한, 통통한 아주머니들이 많은 거예요. ‘혹시 김을동 동생이라는 말 안 듣슈?’라고 하니까 막 웃으시더라고요.”
김을동 의원은 “5대가 선거운동을 했다”고 한다. 알려졌다시피 김 의원의 할아버지는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 장군이고, 아버지는 김두한 전 의원. 이들의 후광을 등에 업은 데다, ‘송일국의 어머니’라는 수식어와 최근 얻은 ‘세쌍둥이의 할머니’라는 닉네임까지 더해졌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선거운동을 했어요. 선거는 세 표 차이로도 떨어질 수 있거든요. 결국 송파 병에서 당선됐고, 새누리당의 영토를 확장했다는 뜻으로 ‘광개토여왕’이라는 닉네임을 얻게 됐죠.”
박근혜 대통령이 '헌정 사상 첫 부녀 대통령'이라면, 김을동 의원은 '헌정 사상 첫 부녀 국회의원'이다. 그동안 부자 국회의원은 많았으나, 부녀 국회의원은 없었다. 고 김두한 전 의원은 3대와 6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니 부녀가 나란히 재선에 성공한 셈이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공수래공수거' 한 사람이에요. 한 번도 자신의 재산을 가져본 적이 없었어요. 아버지에게는 오직 조국과 민족, 동료만 있었죠. 어머니와 제가 고생을 많이 했죠. 저는 어머니 이야기에 눈물이 나오다가도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면 나왔던 눈물이 쏙 들어가요."
평생 배우로 살아온 김을동 의원은 2003년 한나라당 경기성남수정지구당 위원장을 지내면서 정치인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17대 총선에서 이 지역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지만 실패했다. 다시 정치인의 삶을 살려면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한창 배우로 승승장구하던 아들의 앞날에 피해가 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정치를 하다 보면 가족이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아요. 실제로 야당 시절 캐스팅에 불이익을 받은 적도 있고요. 친박연대에서 비례대표로 추천을 받았을 때는 일국이가 한창 국민배우로 인정받을 때였거든요. 자칫 아들에게 누가 될까 해서 두 번이나 거절했어요. 그런데 다시 와서 선거운동을 해달라는 거예요. 고민 끝에 가족회의를 소집했죠.”
가족들은 대부분 반대표를 던졌다. “저희가 용돈 충분히 드릴 테니 편안히 계세요.”라며 말렸다. 며느리인 정승연 판사만 유일하게 찬성했다.
“며느리가 그러더군요. ‘어머니께 비례대표 제안이 들어온 건 어머니가 그동안 일궈놓으신 몫이에요. 만약 그로 인해 저희가 불이익을 당한다면 그건 저희가 인생을 살면서 감당해야 하는 몫이고요. 부담 갖지 마세요.’ 며느리의 말에 바로 백만 원을 내고 후보 등록을 했어요.”
김 의원은 당시 친박연대 비례대표 5번 후보에 배정됐다. 신생정당이라 3번까지도 당선이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친박연대가 비례대표 의석을 8석 얻게 되면서, 김 의원은 꿈을 이루게 됐다. 며느리의 지지로 시작한 일이다.
잔소리 한번 안 하고 키운 아들 송일국
상황이 이렇다 보니, 김 의원의 며느리 사랑은 지극하다. 세쌍둥이를 낳았으니 대견하고, 자신의 꿈을 누구보다 지지해주니 고마울 수밖에 없다. 드라마에서 보던 엄한 시어머니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김 의원은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아들을 키웠다.
"저는 아이들을 키울 때 울타리만 쳐놓고 방목했어요. 그러다 보니 인내심이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되더라고요. 욕실에 들어가 물을 틀어 놓고 소리를 지르더라도 잔소리는 하지 않았어요. 잔소리를 하지 않으니 아이들이 밖으로 돌지 않았어요. 하다못해 친구네 집을 가도 친구 엄마가 잔소리를 하는데, 집에는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으니 얼마나 편해요."
김 의원은 아이들에게 잔소리가 먹히기는커녕 오히려 반발심만 생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 속을 무척 썩였어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어머니가 힘들게 번 돈을 가지고 극단을 따라 전국을 돌아다녔죠. 옷이나 신발도 벗어서 아무 데나 놓고. 오죽하면 저희 어머니 소원이 제가 댓돌 위에 운동화를 나란히 벗어놓은 걸 보는 거였겠어요. 종아리도 많이 맞았는데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죠."
김 의원은 참다 참다, 어쩔 수 없이 꼭 한 마디 해야 할 때만 남매를 불러 훈계를 했다. 자주 하는 이야기보다 훨씬 잘 먹혀 들어갔다.
"다른 건 몰라도 겸손은 늘 강조했어요. 매일 마주치는 도우미 아주머니나, 아파트 경비아저씨들에게 인사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했어요. 일국이가 그 덕분에 방송국에서도 인사 잘하는 연기자로 유명해요. 한 번은 인터뷰에서 아들에게 '인기를 얻고 달라진 것'을 물었는데, '예전에는 방송국 들어갈 때 경비 아저씨들께 인사를 해도 잘 안 받아 주셨는데, 이제는 아저씨들이 먼저 인사를 한다'고 답했을 정도니까요."
요즘 김 의원은 아들의 눈치는 보지 않는다. 마음 편히 잔소리하고 구박도 한다.
"아들은 '우리 엄마가 나이 드셔서 땡깡 부리는구나'라고 생각하겠죠. 이젠 제가 '이 못난 몸아!' 해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못나지 않았으니 전혀 스트레스 받지 않거든요. 오히려 톱스타에게는 옆에서 쓴 소리 하는 사람도 필요하고요. 이제는 자신을 다스릴 수 있게 됐으니까요."
송일국 역시 인터뷰 때마다 어머니의 가르침에 가슴 깊이 감사해한다. 어머니처럼 그 자신도 세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울 생각이다.
"일국이도 아이들을 정말 자유롭게 키울 거라고 해요. 못하면 못하는 대로, 잘하면 잘하는 대로. 저희 부모를 닮았으면, 한 놈 정도는 공부를 잘할 거고, 또 한 놈은 못하기도 하겠죠?"
김을동 의원은 자신의 행운을 "모두 조상의 은혜"라고 말한다. 으레 하는 말이 아니다. 그는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를 세우고 중국 땅에 청산리대첩기념비와 김좌진장군기념관, 백야광장 등을 건립했다. 이 사업을 추진하면서 날린 돈만해도 압구정동 65평 아파트 한 채다. 해마다 아들과 '청산리 대장정'을 진행하고 있고, 국회의원들과 함께 항일 역사탐방에 나서고 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이익이 되어서 하는 일도 아니다. 김좌진 장군의 손녀로 타고난 운명과 DNA를 통해 물려받은 투철한 민족의식 때문일까. '세쌍둥이'와 '광개토여왕'은 열심히 살아온 인생에 대한 보너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