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크라이마미, 영화

김에리의 ‘대중문화’

※이 칼럼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그녀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생존투쟁을 기억했을까

물리치료학을 전공하는 23세 인도 여대생 조티 싱 판데이는 2012년 12월16일(현지시간) 뉴델리의 한 쇼핑몰에서 남자친구와 만나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를 관람했다. 한 시간여가 지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빈민가에 사는 6명의 남자에게 잔인하게 구타와 성폭행을 당했고 160㎝ 40㎏의 가녀린 몸매는 만신창이가 됐다. 늦은 시간 남자친구와 함께 벌거벗겨져 도로변에 버려졌던 조티는 한 시간여 뒤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3일간의 사투 끝에 숨졌다. 이 영화는 그녀가 생애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됐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캐나다 외교관의 아들 얀 마텔이 원작소설을 썼고, 할리우드 자본으로 대만 출신 이안 감독이 연출했다. 2001년 발간된 이 소설은 영국 부커상을 타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2002년부터 여러 명의 감독들이 영화화를 시도할 정도로 매력적인 이야기다. 인도 출신의 M 나이트 샤말란, ‘판의 미로’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등 판타지에 강한 멕시코 감독 알폰소 쿠아론,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아멜리아’의 프랑스 감독 장 피에르 주네 등이다. 결국 이안 감독이 메가폰을 잡게 됐고 24일로 예정된 제85회 아카데미시상식 12개 부문 후보에 오를 정도로 아름답고 웅장한 3D영상을 만들어냈다.

주인공은 인도인이다. 같은 피부색과 생김새의 동족 배우들의 출연이 인도인들에게는 반가웠을 터이다. 한국에서는 새해 첫날 개봉한 이 영화는 인도에서는 지난해 11월23일 개봉해 흥행에 성공했다. 조티도 남자친구와 다른이들처럼 이 영화를 감동하며 즐겼을 것이다.

조티는 엄청난 통증 속에서도 의식을 잃지 않았다. 가해자들은 그녀의 몸속에 쇠막대를 집어넣어 내장을 손상시켰고 그녀는 신체와 뇌의 부상에 따른 극심한 장기부전을 겪었다. 입에 호스를 물고 있어 말을 하지 못했지만 가족, 경찰과 필담을 나눴다. 그녀의 아버지는 “조티가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살고 싶어 했다”며 “노트에 ‘살아남아서 계속 가족 곁에 머물고 싶다’고 적었다”고 전했다. 뉴델리에서 감염된 장기와 생식기 일부를 들어내는 등 3차례 수술을 받고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결국 싱가포르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지난해 12월29일 숨을 거둬 힌두교 장례절차에 따라 한줌 재로 돌아갔다. 죽기 전 동생에게 자신은 천국에 갈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녀가 사고를 당하기 전 마지막으로 본 영화의 여운을 잠시라도 상기할만한 정신이 있었는지는 가늠할 수 없다. 이 영화는 227일간 호랑이와 함께 망망대해를 표류하고도 생존한 열여섯살 인도소년 파이의 이야기다. 그 생존기에 대한 기억이 조티에게 조금이라도 의지가 됐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파이가 처해있던 막막함만큼 조티는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처절한 고통 속에 고독했을 것이다.

파이는 절대고독에서 조각배 위 벵갈호랑이와의 동거를 상상했을 것이다. “리처드 파커(호랑이 이름)를 먹여살리는 것이 나를 계속 살아가게 해주었다”고. 자기 안에서 포효하는 외로움, 괴로움과의 싸움, 길들임. 결국 호랑이는 그 자신이었다. 파이의 아버지는 파이가 리처드 파커의 눈 속에서 본 것이 그 자신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파이의 비밀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살짝 드러난다. 현실은 처참했을 것이다. 잔인한 조리사는 부상당한 채식주의자 선원을 죽이고, 물고기를 낚을 미끼가 필요하다며 파이의 어머니도 살해한다. 결국 파이는 죽지 않기 위해 요리사를 죽이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얘기를 비춘다.

사실은 뭘까. 그는 살아남기 위해 또다른 스토리를 만들어 냈고 결국 신을 긍정한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1999)에서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간 귀도가 아들 조슈아에게, 이건 신나는 놀이이자 게임일 뿐이라고 현실을 각색해 보여주는 것처럼.

조슈아가 살아남았 듯 파이는 결국 살아남았다. 영화의 강력한 힘이 실제에까지 미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신착란이라도 일으킬 듯한 지독히 잔인한 현실에서도 조티는 의식을 놓지 않고 굳건한 생존 의지를 보여줬다. 그러나 그렇게 버티기에는 부상이 너무 컸다. 조티는 결국 숨을 거뒀다.

2. ‘밴디트 퀸’이 보여주는 강간대국 인도, 우리는?

가부장제와 여성혐오 문화를 가진 인도에서 성폭행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남아선호사상으로 여아를 낙태하며 성비불균형이 일어나고 결혼하지 못한 하층계급 남성들의 범죄율이 상승한다는 이론도 있다. 서구 언론은 하루가 멀다 하고 조티 사건을 전했고 야후 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본 뉴스로 종종 집계됐다. 최근에는 사건현장에 함께있던 남자친구 인터뷰가 잇따라 보도되고 있다.

국내 언론까지 연일 현지 성폭행 관련 사건들을 보도하기도 했지만 조티 사건 이후에도 강간, 윤간은 그치지 않고 있을 만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듯하다. 조티 사건으로 만연한 성폭력에 대한 인내심이 임계점에 도달한 인도인들, 특히 여성들이 대규모 항위시위에 나서게 됐다. 우리에게 인도는 영국에 대한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이같은 폭력시위는 인도에서 유례가 없던 것이라는 소식도 들려온다.

현지 실상과 풍토를 아는 이들은 마냥 낭만적이고 고혹적으로만 인도를 묘사해놓은 어느 여성작가의 여행기가 위험한 환상을 품고 인도로 가게하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실제 배낭여행이 붐을 이루기 시작할 무렵 지방지 논픽션 공모에서 인도여행 중 현지인이 준 음료를 마시고 정신을 잃은 후 성폭행 당한 두 한국여성의 후일담을 다룬 이야기가 당선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지난 1일에는 홀로 인도를 여행하던 한국인 여대생이 성폭행을 당한 것이 기사화되면서, 무성하던 소문이 현실로 다가왔다.

볼리우드는 세계 3대 영화시장으로 성장했지만, ‘밴디트 퀸’(1994)만큼 인도의 뿌리깊은 성차별과 성폭력, 계급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영화는 없었다. 실존 주인공 풀란 데비는 불가촉 천민으로 태어나 11세의 나이에 자전거 1대와 암소 1마리에 나이 많은 남편에게 팔려갔다가, 그의 학대와 강간을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되돌아온다. 촌장 아들의 구애를 거절한 후 추방당하고 모함을 받아 경찰관에게 학대와 강간을 당하고, 경찰과 결탁된 갱단에게 잡혀 갱단 두목에게 또 상습적으로 강간당한다.

풀란을 사랑하는 부대장 비크람이 이 대장을 사살하고 그의 도움으로 갱단을 이끌게 되지만, 원래의 대장이 경찰에게 풀려나 돌아오며 납치당해 상류 카스트 남자들에게 폭행, 윤간 당하고 벌거벗겨진 채 온 마을을 끌려다니게 된다. 그러나 풀란은 여기서 무너지지 않는다. 산적 두목이 돼 의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고 자신을 능욕한 22명의 남자들을 공개처형한다. 조혼여성의 결혼식을 훼방놓고 겁탈과 이혼 등으로 자살을 강요당하는 여성들의 인권회복에 앞장선다.

이 영화는 ‘타임’지에 의해 그해 세계10대 영화로 선정됐고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들기도 했다. 그러나 반정부적이라는 이유로 인도정부는 상영금지 처분을 내렸고 인도의 신비한 이미지가 깨지고 불합리한 사회상이 대외적으로 알려질 것을 우려, 각국에 상영을 제한해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풀란 데비는 1983년 강간금지, 아동학대 금지, 계급 폐지, 동료들의 안전 등을 조건으로 투항해 투옥됐다. 94년 사면돼 하층계급을 위한 사회운동가도 활동하다가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98년에는 노벨평화상 후보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2001년 암살당하고 말았는데, 범인은 얼굴에만 세 발의 총을 쏴 원한에 의한 보복성 살인임을 증거했다. 범인은 그녀가 살해했던 상위 카스트들의 복수를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인도의 성폭력 문제에는 남존여비 문화에 계급 문제까지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지난해 신고된 뉴델리 성폭행 661건 가운데 상류층 피해는 단 1건에 불과하다. 국립범죄기록국에 따르면, 2011년 인도에서 총 2만4206명이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보고됐다. 20분마다 여성 1명이 성폭행을 당한 셈이다.

한국에서도 ‘돈 크라이 마미’(2012)와 같은 성폭행 피해 여학생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여전히 현실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성폭력을 당하고도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한 여성의 법정투쟁 실화를 다룬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1990)

국내 첫 페미니즘 영화로도 꼽히는 이 영화가 나온 지 22년이 지난 2012년, 법원은 영화에서처럼 강제로 키스하려는 남성의 혀를 깨물어 3분의 1가량을 절단한 20대 여성을 입건해 중상해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결국 검찰시민위원회에 의해 정당방위를 인정받게 됐으나 언론은 이 판결에 대해 여전히 ‘이례적’이라고 평했다.

문화평론가 EriKim021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