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한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던 문짝, 사물함 등을 가져와 꾸민 디자이너 안태옥의 쇼룸.

패션 디자이너들의 대화 수단은? 당연히 '옷'이 먼저다. 하나 더. 바로 '공간'이다. 자신의 디자인과 브랜드가 지향하는 바를 공간을 통해 표현한다는 뜻이다. 그런 공간을 보통 '쇼룸(showroom)'이라고 부른다. 전시장·매장을 겸한 공간을 브랜드 콘셉트에 맞게 꾸며서, 소비자들이 자연스럽게 브랜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소비자들은 디자이너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쇼룸을 찾기도 한다. 디자이너가 쇼룸 안에 사무실을 두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패션 커뮤니티 등에서는 "학원 수업시간을 바꿔서라도 디자이너가 있을 때 가야겠다"와 같은 반응을 쉽게 볼 수 있다. 해외 유명 컬렉션에서 자신의 브랜드를 선보여온 유명 기성 디자이너부터 편집매장 위주로 판매하는 젊은 국내 디자이너까지 쇼룸을 개성 표현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는 추세다.

남성복 디자이너 우영미는 지난해 5월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맨메이드 우영미'를 열었다. 1988년 그가 론칭한 '솔리드옴므'는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브랜드지만 2002년 파리 컬렉션서 처음 선보인 브랜드 'WOOYOUNGMI'는 상대적으로 생소하다. "솔리드옴므 매장 한편에 몇 점씩만 들여놓던 컬렉션 브랜드를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공간을 마련했다"고 한다. 벽에 걸린 옷 둘레에 액자틀을 붙여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듯 의상을 감상할 수 있게 한 실내 디자인이 독특하다.

벽에 액자틀을 설치하고 그 안에 의상을 걸어 갤러리에서 미술 작품을 둘러보듯 옷을 감상하게 한 우영미의 쇼룸.

남성복 디자이너 안태옥은 지난해 9월 서울 이태원동에 작업실을 겸한 쇼룸을 열었다. 그가 디자인한 옷 중에는 오래된 옷에서 영감을 얻은 것들이 많다. 쇼룸도 이 느낌에 맞춰 꾸몄다. 출입문과 실내의 조명, 벽시계, 장식으로 쓰는 사물함 등은 "20세기 중반의 분위기를 내고 싶어 1950년대 미국 오하이오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실제로 사용하던 물건들을 가져다 썼다"고 한다.

디자이너 윤형석과 스티브J&요니P도 2011년부터 사무실을 겸한 쇼룸을 운영하고 있다. 윤형석의 '커버낫'은 사냥·낚시 등 빈티지 아웃도어 의류나 작업복에 기반한 남성복을 선보이는 브랜드다. 서울 논현동 쇼룸의 콘셉트는 '로지'(lodge·산장 등 나무로 지은 작은 집). 따뜻한 느낌의 벽돌로 실내를 마감하고 사슴 머리 박제와 뿔 장식을 벽면에 설치했다. 스티브J&요니P는 서울 한남동 쇼룸에 직접 그린 그림들을 걸었다. 두 디자이너의 모습을 형상화한 인형으로 실내를 꾸미기도 했다.

패션컨설팅 회사 크리에이티브 팩토리의 안수경 디렉터는 "매장이 물건을 파는 곳이라면 쇼룸은 디자이너가 창의성과 독창성이라는 가치를 파는 곳"이라고 했다. "자본력, 유통 규모에서 대기업 브랜드와 경쟁할 수 없는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저마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쇼룸을 활용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