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열풍이라지만 완독자(完讀者)는 얼마나 될까. 소설 원작은 총 5권, 2556쪽(민음사판)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2~3시간을 투자하면 가능한 영화·뮤지컬 관람과 소설 완독은 전혀 차원이 다른 공력이 필요하다. 이들은 얼마나 '독한' 사람들일까. 그리고 책을 끝까지 읽은 사람들은 어떤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27일 오전 11시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강남출판문화센터 1층의 북카페. 레미제라블 완독자들의 미니 독서 모임이 열렸다. 참석자는 4명. 의사 출신인 양기화(5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 평가위원, 전 대안학교 교사 신혜정(50)씨, 부부 건축가로 이름난 임형남(52)·노은주(44) 가온건축 공동대표다. 마치 유세 부리는 것처럼 보일까 부담스럽다며 거듭 사양하던 수줍은 독서가들을 어렵게 한자리에 모았다.
◇"그래도 프루스트보다는 쉽더라"-완독의 고비
네 사람 모두 이번에 5권을 완독한 경우. 초등생 시절의 축약본 '장발장'이 전부인 줄 알고 있다가, 5권이라는 소식에 깜짝 놀라 다시 찾았다고 했다. 독서 속도와 열정도 놀라웠다. 올봄 중2가 되는 막내 아들을 포함해 아들 셋의 엄마인 신씨는 "아이들 밥 차려주는 것도 잊고 3일 만에" 독파했다. 책의 클라이맥스와 식사 시간이 겹치면 빵 사먹으라고 지갑을 열어줬다고 했다. 다독가로 이름난 부부 건축가의 경우, 이번에는 남편 먼저, 아내 다음의 '릴레이'로 읽었다. 노 대표 역시 3일 만에 마지막 페이지를 끝냈다고 한다. 다 읽는데 한 달 걸렸다는 양 위원의 경우가 일반독자에게는 그나마 위안이다. 워털루 전투나 파리의 하수도 묘사 등 기둥 줄거리가 아니면서도 100쪽가량 이어지는 등 빅토르 위고 특유의 장광설은 어떻게 견뎠을까. 인터넷 서점에 독서 블로그를운영하며 지난해 230권의 리뷰를 썼다는 양 위원은 "그래도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보다는 훨씬 편했다"고 말해 공감의 폭소를 이끌어냈다.
◇영화와 뮤지컬은 소설의 1/100-완독의 교훈
열정적 독서가들의 주장을 실용적으로 요약하면 "소설이 훨씬 재미있고, 실제 인생에 교훈이 된다"는 것이다. 추상적 언어로 압축한 '레미제라블'의 교훈은 '구원의 진정한 의미와 삶에 대한 성찰'이다. 임 대표는 '본의 아닌 구원' '아이러니한 구원'이라는 표현을 썼다. 지치지 않는 악당인 테나르디에의 장발장에 대한 험담이 역설적으로 코제트와 결혼한 마리우스에게 자신의 장인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해 줬고, 결과적으로 마리우스와 장 발장 모두의 구원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미리엘 주교의 사랑과 용서, 장발장의 희생과 봉사만이 구원에 이르는 외길은 아니라는 것. 또 양 위원은 "깨달음은 한순간에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장발장이 악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자베르 경감은 그때마다 외면하거나 무시한다. 시행착오를 반복하다 마지막 순간 어떤 '임계점'에 도달해서야 성찰은 찾아온다.
하지만 영화와 뮤지컬은 실제 삶에서는 보기 힘든'극적 순간'들로만 이어진다는 것. 게다가 몇몇 등장인물에게 사건과 행동이 집중된 영화·뮤지컬과 달리, 소설은 수많은 캐릭터가 존재한다. 입체적이고 개별적인 감정이입이 가능한 대목이기도 하다.
'레미제라블'을 낙선한 후보를 지지한 진영의 힐링용 작품으로 보는 데 대한 경계도 있었다. 중고생을 위한 대안학교에서 에세이 쓰기를 가르쳤다는 신씨는 "아이들이 영화 때문에 이 작품을 혁명과 폭력 쪽으로만 보게 될까 두렵다"면서 "레미제라블의 교훈은 남 탓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돌아가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작가의 망설임까지 보인다 -완독의 필요성
완독과 축약본 독서의 차이에 대해 임 대표는 조선시대 화가 김홍도의 '자리 짜기'를 예로 들었다. 돗자리 짜는 데 여념이 없는 부부와 그 옆에서 책을 읽고 있는 소년. 작은 그림이나 모니터로 보면 무심히 지나치지만, 원화로 보면 소년의 등에 있는 실패한 붓 자국, 화가의 망설임까지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과 대중가요에 빗댄 해석도 있었다. 음악을 들으며 자신이 그 주제를 상상하고 사유를 펼쳐가는 클래식과 달리, 대중가요는 노랫말의 주제가 워낙 선명해 다른 상상을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거의 전지전능한 신처럼 주인공과 사건의 모든 것을 묘사하는 빅토르 위고지만, 그는 장발장이 마들렌이라는 가명을 쓰며 선한 인물로 돌아올 때까지의 8년을 설명하지 않는다. 이날의 독서가들은 "장발장은 틀림없이 8년 동안 독서로 내공을 쌓았을 것"이라며 "장발장의 존재야말로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라며 소리 내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