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의 해, 계사년(癸巳年). 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꿈틀거리는 몸뚱이, 섬뜩한 피부, 날름대는 혓바닥, 그리고 치명적인 독(毒)…. 다들 진저리부터 치지만 그건 뱀의 진짜 가치를 몰라서다. 고부가가치 천연자원으로 손꼽히는 뱀독 시장 규모는 수조 원대에 달한다.
국내 뱀독 연구 1인자인 정광회(53) 차의과학대 바이오공학과 교수는 "세계적으로 3300여종의 뱀이 있고 우리나라에 14종이 서식하는데 이 중 살모사와 쇠살모사, 까치살모사 등 3종이 독을 갖고 있다"며 "뱀독에 포함된 수백 가지 성분 중 인체 시스템에 영향을 주는 펩타이드(단백질 조각)를 추출해 의약품으로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시장 규모가 가장 큰 것은 고혈압 치료제로 쓰이는 캡토프릴(captopril). 세계 80여개국에서 1조원 이상 판매되는, 뱀독 관련 의약품 분야의 '히트 상품'이다. 뱀에게 물리면 혈관이 이완되는 점에서 착안, 혈관 수축을 억제하는 성분을 발견했다. 하라라카 살모사의 독에서 추출한 펩타이드를 화학적으로 합성하면서 대량 생산이 시작됐다. 브라질 남부와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북부 지역에 사는 하라라카 살모사는 몸길이가 1.2m까지 자라며 풀숲에서 많이 발견된다. 회갈색 바탕에 진한 갈색 무늬가 특징. '한 번 물리면 끝'이라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인테그릴린(integrilin) 성분을 이용한 항혈전제(抗血栓劑) 시장은 3000억원대를 넘는다.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급성 관상동맥 증후군은 '피떡'이라 불리는 혈전이 관상동맥을 막아 발생하는데, 인테그릴린은 혈소판이 서로 엉겨붙지 못하게 만든다.
최근 TV 홈쇼핑과 인터넷 쇼핑몰에서 여성 고객들을 끌고 있는 '뱀독 화장품'은 신경 독소를 활용한 제품이다. '독한 주름, 독하게 관리한다','기적의 안티 에이징(anti-aging) 기능' 같은 문구를 내걸었다. 뱀독과 유사한 성분이 안면 근육을 이완시켜 주름살이 펴져 보이는 효과를 준다고 한다.
정 교수는 뱀독 중 배트록소빈(batroxobin)의 지혈 기능에 연구력을 모으고 있다. 브라질산 뱀에서 천연독을 추출하는 스위스 업체와 달리, 미생물 배양을 통해 대량 합성하는 방식으로 특허를 받았다. 독을 추출할 때 뱀에게 고통을 주지 않아도 되고, 순도 높은 뱀독 성분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정 교수는 "독사가 한 번에 분비하는 독의 양은 살모사가 80㎎, 칠점사는 300㎎ 정도"라며 "용문산 뱀집 등에서 뱀독을 구하느라 쓴 연구비가 중형차 한 대 값을 넘는다"며 웃었다. 그는 칠점사(까치살모사)의 독에서 암 전이를 억제하고 혈전 예방 효과가 탁월한 삭사틸린(Saxatilin)을 추출해 항암제 개발을 추진 중이다. 외국에서는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 일본 미야자키대와 싱가포르국립대 등에서 4~5개 팀이 연구를 벌이며 뱀독 의약품의 가능성을 키우고 있다.
정 교수는 "수술 부위에 뿌려서 바로 피가 멎게 하는 스프레이형 제품, 배트록소빈 성분을 첨가한 지혈 밴드, 혈액 응고 진단 키트 등 응용 분야가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