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지음|일조각|3만원|360쪽
"이제 형(장제스)은 쉬운 길을 가고, 나는 어려운 길을 간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12월 18일, 국민당 충칭(重慶) 정부의 2인자였던 왕징웨이(汪精衛·1883~ 1944)는 장제스에게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베트남의 하노이로 떠났다. 일본과 외교교섭을 통해 중·일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이루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 왕은 일본이 점령한 상하이에 친일(親日) 괴뢰정권을 세우는 데 협력했다. 민족 반역자로 낙인찍히는 순간이었다.
왕징웨이는 20대 초반 일본 유학 때부터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신해혁명에 뛰어들었고, 국민혁명,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중화민국 전시기에 걸쳐 활약한 정치 지도자였다. 쑨원의 오른팔로 불리며 국민당 좌파의 중심인물로 국공(國共)합작을 추진해 좌파정권인 우한(武漢) 국민정부를 이끌었다.
그런 왕징웨이가 왜 친일정권 '수괴'로 나서게 됐을까. 중국 현대사 연구자인 배경한(59) 신라대 교수는 애국과 매국의 이분법적 관점에서 벗어나 왕징웨이의 전 생애에 걸쳐 그가 추구한 민족주의에 대해 다층적 시각에서 접근한다.
왕징웨이는 중화민국 탄생의 공신이었으나 그의 라이벌은 장제스였다. 군사적 기반이 없던 왕징웨이는 여러 군벌과 장제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왕은 늘 장제스에게 패했고, 그때마다 유럽으로 떠났다 돌아오길 되풀이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왕징웨이는 행정원장을 맡으며 장제스와 다시 협력한다. 왕징웨이는 대일(對日) 문제에 대해선 장제스와 의견이 같았다. 일본과의 전면전은 승산이 없기 때문에 저항과 교섭을 동시에 펼쳐야 한다는 것. 왕징웨이는 1936년 시안사변 후 항일전쟁을 위해 제2차 국공합작이 이뤄진 후에도, 공산당의 위협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경한 교수는 국민당 좌파 지도자로서 경험한 공산당과의 합작 실패와 그로 인한 공산당에 대한 불신, 장제스와의 권력투쟁에서 맛본 좌절과 패배, 1938년 우한(武漢)을 비롯, 중국 대부분의 지역이 점령당함으로써 항일에 대한 좌절과 무력감이 왕징웨이를 친일협력으로 내모는 데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한다. 여기에 혁명을 위한 무정부주의적 자기희생도 한몫했다는 것.
왕징웨이는 일본과의 협력을 위해 하노이에 머물다 충칭 국민정부가 파견한 특공대원에게 습격당한 직후, 이렇게 썼다. "왜 충칭을 떠났을까? 나는 스무 살 조금 넘어 혁명에 투신한 이후 한 번도 나 자신을 위한 계산을 한 적이 없다." 왕징웨이는 자신의 지위나 명예, 목숨까지 희생하면서도 평화적 방법으로 전쟁 종결을 도모하려 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왕징웨이에 대한 재평가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왕징웨이와 그의 추종자들인 '화평파'가 친일로 옮겨간 동기에는 승산 없는 전쟁의 참화에서 중국 민족을 구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점과 친일정권 수립 이후에도 정치적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한 점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그의 삶은 최남선·이광수 등 '친일 민족주의자'들이 걸었던 길과 흡사하다. 이들과 왕징웨이의 최대 비극은 파트너로 골랐던 일본이 그를 철저하게 허수아비로만 이용했다는 점이다.